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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부스 타입~ 모바일 게임 <더스크우드> 드림 작업물입니다!
타운 전체가 대학 건물로 뒤덮인 주립대 교정에는 별별 사람이 다 모인다. 건물 내부 1층까지는 개방되어 있기도 하고, 강의실 층계는 통제되지만 그렇게 까다롭지 않아─술에 취해 대마를 빨지만 않으면 들여보내 주는 게 관습이었다. 따라서 2층 여자 화장실은 거의 공중화장실 개념이었고 학생들은 외곽 건물 수업을 들으면서 ‘여기가 학교’라는 관념을 거의 잊은 채였다.
제이크는 이 사실을 잘 몰랐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곧장 기피하고 보았던 그이기에, 애초 도시를 지나 천변 쪽 가옥으로 피신하려 했을 따름인데 중간에 자동차가 뻗어버렸다. 폐차된 차 번호를 단 고물 트럭이 털털거리며 멈추어 서자 담뱃가게 앞에서 해를 쬐고 있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학생이구먼.” 막 입학하여 부모님의 오래된 트럭을 물려받은 교외 청소년 취급을 받았다는 걸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며칠 즈음 이 소도시에 머물러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선 순간이었다.
숙소는 기숙사와 맞붙어 학생들이 주로 사는 하숙으로 구했다. 남자와 여자 층이 외따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낮이면 왁자지껄한 소리가 한두 군에 방안에서 들려왔고, 저녁이면 술 한잔 걸친 청년들이 떠들썩했으며, 밤이면… 뭐, 뻔하지. 주인도 웬만한 소란이 아닌 이상 눈감아주는 모양이었다. 제이크와 같은 단기 세입자의 사정을 고려할 필요까지 느끼진 못했을 것이다. 모든 학생은 졸업하는 법이며 어느 만학도라도 결국 고향마을로 돌아갈 뿐이니 세낸 주인과 학생들 간의 희미한 유대를 이해할 만했다.
제이크는 그 점이 썩 마음에 들었다. 다만 문제는 그가 일하는 시간이었다. 밤낮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쪽잠을 청하는, 패턴을 무시한 육신인 그에게 일정 시각마다 들려오는 소음이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그리고 제이크는 다른 사람처럼 귀에 낄 이어폰이 없었다.
이게 제이크가 더러운 공중전화 부스에 몸을 구긴 이유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파란색이었다. 왜 갑자기 형이상학적인 논의로 들어가느냐면, 이제 그런 칠의 흔적이란 부스 내부 먼지 낀 귀퉁이로만 확인 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막 행실 자유로워진 나이대 스트릿 아티스트들이 야심 차게 스프레이를 뿌려 놓아 겹겹이 칠한 유화 캔버스처럼 날카로운 그라피티가 서로를 꿰뚫고 있었다. 예컨대: 브루클린, 브루클린! ─ 꺼져, 패트릭이 ─ 메롱 ─ 아임 뱅크시 앤드 디스 마이 쓋 ─ 같은 거였다.
도시 미화 담당자는 벽화를 그리는 대학생에게 ‘하늘과 구름’을 표현해달라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저 활자 그래픽을 보며 그것을 천공의 파랑과 연결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제이크는 이 공중전화 부스에 쓰레기 봉지가 차 있는 꼬락서니만 며칠 내내 보고 있었다. 도시 미화 하청 직원이 여길 휴게소 내지 창고쯤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머리 꼭대기에 새 모양 풍향계를 단 공중전화 부스는 이렇게 처음 일주일간 제이크의 신경에서 한참 멀어져 있었다.
변화는 느리고 자그맣게 일어났다. 늘 늦게 돌아오는 듯한 여학생 하나가 그 공중전화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제이크의 방 창문에서는 뒷골목이 잘 보였고,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여자는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가로등이 깨진 곳이었으므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까 눈이 가기도 했다.
그 학생은 나날이 같은 시각에 돌아왔다. 나흘 즈음 되었을 때, 제이크는 문득 목소리를 들었다. 깜빡하고 창문을 열어 놓은 모양이었다. 무더운 냄새를 이끌고 바람 한 줄기가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에이미가… 닥터 보스만이랑…”
구식 건물이 다 그렇듯, 창문은 위아래로 밀어 여닫는 식이었다. 무심코 창틀을 붙잡고 콱 내리 닫으려던 제이크는, 그 소리에 멈칫했다. 지금 창을 닫았다가는 눈치를 주거나 엿들었다고 생각하기에 십상이었다. 마침 여덟 시간 정도를 쉼 없이 모니터만 바라본 터여서, 그는 눈을 끔뻑거리며 어두워진 바깥에 시야를 적응시켰다. 여자는 계속 이야기했다. 거리와 바람에 휩쓸려 절반은 날아갔지만 절반 정도는 확실히 들렸다.
“응, … 결과… 이 좋아. 졸업하면─”
제이크는 드문드문 들리는 단어만으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는데, 그대로 잊어버렸다. 통화는 삼십 여분 간 이어졌고 제이크는 의자를 창 앞에 두고 앉아 여학생이 하숙집 건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에 관해.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이 집은 불법 증축하여 방음이 허술했다. 제이크는 하이힐을 신은 발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렸고, 문이 닫히자마자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늘 ‘왜’에 관해 약했고 ‘어떻게’와 ‘무엇을’은 쉬웠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전화 부스를 사용하려면 동전이 필요하다. 그는 헐거운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버려둔 동전을 쓸어 넣었다.
눈앞에 그게 있었다. 직접 보니 삼십 년은 이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허름하고, 불완전해 보였다. 아니… 계속해서 층을 올리다가 결국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종류의 케이크 같은. 저 문을 열고 들어가 작동하는 수화기를 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불현듯 제이크는 자신이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번호를 누르는 것까지는 쉽다. 제이크는 상대가 받지 않았으면 했다.
쓰레기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고약한 습기를 묻혔다.
- 네, 여보세요?
젠장.
- 누구시죠?
한껏 집중했다가 깨져 신경이 거슬린 사람처럼 무성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제이크는 걱정스러웠다. 그의 생각으론 이 야심한 시각에 모르는 번호로 온 연락을 받는 게 터무니없이 위험한 짓으로 생각되었다. 제이크는 입을 다물고, 밤이라 먼지 더께가 보이지 않는, 만지기 싫을 만큼 더러울 듯한 공중전화기 위에 동전을 쌓아 놓았다. 그때까지 상대방은 끊지 않았다.
그래, 패배할 수밖에 없단 걸 제이크는 잘 안다. 그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나다, 수.”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아는 건 숫자 몇 개뿐이니까. 가지고 있는 패스워드가 오묘하게 뒤섞인 애너그램 속에 앉아, 그 일부밖에는 보여주지 않는 문자를 멀리에서 보려고 애쓰는 느낌. 불가역적인 불가능.
상대는 한참 말이 없었다. 제이크는 초조해졌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가능하지 않단 걸 알면서도 그걸 바라며 긴장한다는 건.
- 제이크.
어딘가 잠겨 있는 목소리로, 수가 말했다.
상기하자면 이곳은 내용물이 한데 뭉친 통조림 안처럼 우글우글한 주거지이고, 제이크의 뒤편에서는 실내등만 켜놓고 대마를 피우는 무리가 창을 열어 환기하는 중이었다. 쓰레기 매립지에서 풍겨오는 더러운 바람과 뒤섞여 놀라울 만큼 역겨운 향기가 났고 거기에 관해 항의하는 학생이 창을 덜컹 들어 올리더니 뭐라 뭐라 소리쳤다. 야 이 -야 적당히 - 대강 이런 말들.
제이크에게는 심장이 뛰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 코끝에서는 달걀노른자 같은 비릿한 냄새가 느껴졌는데, 어쩌면 빗물이나 피 냄새일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피가 이렇게 도는데 어디 한군데쯤 살 밖으로 흐르고 있지 않을까… 수화기를 들지 않은 손으로 가슴팍을 꽉 쥐고서, 멍청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당신에게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따위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그는 머리를 짜내 구어체를 강구해냈다.
- 잘… 지냈지.
- 당연하지, 어제도 메신저 했잖아. 괜찮아? …이거 정말 네 목소리야?
- 음. 상황이 안 좋아서… 하나씩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 괜찮은 거지? 쫓기는 게 아니라?
단단히 오해한 수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알 수 없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목소리 말고는 바람 소리만 들리는데 말을 더듬는 데다가 ‘안 좋은 상황’이라면 딱 그거밖에 없었으니. 제이크가 덩달아 조급해져 해명을 위해 입을 열었지만 어디서부터 정정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쫓기는 신세든 빌어먹을 화술이든. 그가 애써 침착한 투로 답했다.
- 아니야.
한순간 수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가, 한숨을 푹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불규칙한 노이즈를 듣고 제이크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지금 웃는 거야? 바로 매서운 질문이 들려와, 뜨끔하며 바로 서야 했지만. 그러느라 낮은 부스 천정에 머리를 꿍 찧었다. 수가 뭐라고 더 하기 전에 제이크가 선수 쳤다.
- 그냥 찧은 거야.
- 뭐?
- ……전화부스 천장에, 머리를, 부딪혔다.
풋, 하더니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제이크는 자기가 바보스럽다는 걸 인지했으면서도 따라 미소 지었다. 호선을 그린 지 오래된 입술이, 부르터 있었는지 아프도록 당겨왔다. 바로 그때, 제이크는 하고 싶은 말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너무 많이 생각났다. 이렇게 많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참았는지 경악할 정도로, 내뱉고 싶은 것들은 유성우처럼 떨어지고만 있었다.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는 밭은 숨을 들이켰다. 꾹 쥔 옷깃은 통화를 끝내면 형편없이 늘어져 버릴 것이다.
끝나면, 그러면.
그는 이 지저분한 수화기를 놓고 싶지 않았다.
- 네가 그리워.
수, 입 밖으로 내뱉은 이름은 마치 호흡 같았다. 어디서건 부를 수 있을 것 같았고 아무 데서도 섣불리 내놓고 싶지 않았는데, 수의 친구나, 주변에 있을 누군가라면 ‘숨 쉬듯이’ 그를 호명할 수 있겠지─까지 생각하자 횃불 같은 질투심이 일었다. 제이크는 조금 시무룩해지는 말투를 숨길 수가 없어 당황했다.
네가 그리워. 바다에 가본 적 없는 아이가 파도를 아는 것처럼, 다시 손을 잡고 싶어. 땀이 배어날 만큼 강하게 끌어안고 싶어. 네 목소리가 좋아. 단맛을 선호해본 적 없지만, 이제 달고 기꺼운 음료의 맛을 알 것도 같아… 보고 싶어. 한 번만 네 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어.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한 다음, 다음 날 아침엔 당연하다는 듯이 같은 거리를 걷고 싶어. 약속하고 싶어. 분명하게 확신해주고 싶어. 그게 무엇이든, 하다못해 저 시끄러운 대학생들처럼 식당이 형편없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신 가지 말자고도 하고 싶어. 우리의 시간을 너무 귀중한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저 네가 좋은 것만 좋다고 했으면… 고작 나 때문에 맛없는 음식을 끝까지 먹는 일이 없었으면.
메시지라면 이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 나눌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번호를 붙여서. 하지만 말이라는 건 덧없이 흩어지는 법이었고, 지울 수가 없는 법이었고 한 번에 한 가지밖에는 내놓을 수 없는 아주 불합리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제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 널 그리워하고 있어.
주변이 고요했다. 귓속에서 피가 도는 먹먹한 소리만 들려왔다. 눈앞은 소용돌이가 이는 듯한 어둠이었고 요금이 더 필요하다는 멍한 목소리에 하늘이 끝난 것 같았다. 제이크는 떨리는 손으로 동전을 집으려다가 모조리 쏟아버렸다. 수화기가 전화선을 늘이며 바닥으로 솟구쳤다. 그는 망연히 두 손을 늘어뜨린 채 통화 종료음을 듣고만 있었다.
그래, 공중전화의 나쁜 점이 있다면 쉽게 끝난단 거다. 말소리란 건 정말이지 연약하기 짝이 없어서… 제이크는 수의 마지막 한 마디를 놓쳤다. 주머니에 든 휴대전화가 여러 번 진동했지만 그는 무언가를 잃은 사람처럼.
이것이 제이크가 공중전화부스에 몸을 구기고 주저앉은 마지막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