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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ㅎㅇ님

나사르 본주 2022. 8. 25. 10:08

파판14 드림 작업물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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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빠진 파피루스

어린 양 저글링

 

 

 

계속되는 파멸이 의미하는 바로는 침묵과 비탄, 애도와 망각, 부활하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등 발에 채도록 많겠지만 그라하에게는 어둠보다도 다른 쪽이 더 중요했다. 기록의 소실.

물론, 이 세상에는 유난한 학자들이 많아서 모든 땅이 수몰된다고 해도 남아 있을 기록보관소를 남겼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 목숨과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언제까지나 이어져야 할 사료들이다. 이 점에서 그라하는 또 생각이 달랐다. 역사는 들추어 볼 사람이 없는 한 무가치하다…….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지. 그래서 모험가가 언약하는 거야.

슬픔을 남기려고.

그라하는 그 내용보다도 루시가 우리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단 데에 놀랐다. 말하는 걸로 봐서, 다른 사람에게 들은 걸 옮기는 것에 불과했겠지만. 그라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시 이 사람은 너무 빛나그리고 멀어. 이 간격이 영웅을 영원하게 만들 것이다.

 

높은 궁려 천정처럼 뚫려 있는 막사 안은 건조한 그늘로 가득 찼다. 이런 임시 천막으로 비바람을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하니, 빛이라도 들게 해 독서의 편의에 보탠 것이다. 책을 인 채 각지를 도는 이 특이한 무리에 관해서는 그라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들은 주로 도시 바깥, 글을 깨우쳤으면 다행인 빈민가에 이야기를 전하러 다니기 때문이었다.

글자를 읽을 줄 모르면 구연해주기도 했다. 비록 무명 소설가가 쓴 조잡한 작품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라하를 위시한 학자들에게 역사서가 그런 것처럼, 이들에게 이야기는 보물과 진배없었다. 그라하는 상상 속 헛것을 좇는 이들을 무지개를 보며 달려가는 사람처럼 보긴 했지만, 얼추 이해했다. 조잡한 작품을 보고 배움의 길에 접어드는 소년이 분명 존재했으니까.

이곳에 들어온 건 오로지 그라하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구멍이 송송 뚫린 천을 매고, 책 상자와, 상자를 엎어 만든 책상을 몇 개 구비해 두었을 뿐인 도서관은 그런데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손에 책을 든 사람은 거의 없다. 서적의 권수가 무척 적으니 내부는 서커스가 지나간 자리처럼 휑해 보이기만 했다.

루시가 상자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라하는 어린애 하나에게 종이가 나달나달한 그림책을 꺼내주다가, 주춤거리며 루시 곁으로 다가섰다. 그라하에게 책을 고르는 행위란 무척 조심스럽고 내밀한 것이어서 궁금증과 동시에,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마음이 든 탓이다. 물론 루시는 아무 생각 없이 얼기설기 엮은 책등을 보여주었다.

뭐라고 쓴 거지?”

그가 물었다. 그라하는 양피지를 바느질한 책 같은 것을 받아서 들어 가죽으로 덧댄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악필에, 심지어 절반쯤 지워져 있었지만 유추할 수는 있었다. 그라하는 웅얼거리듯이 대답했다.

람의신사?”

남자라는 거야 사당이라는 거야?”

글쎄, 조사도 불분명해. ‘바람에어쩌고신사일 수도 있어.”

난 이걸 빌릴래.”

루시가 말했다. 그라하는 약간 당황했다. 그가 호기심을 보일 줄은 몰랐기 때문에. 사실, 루시는 거의 모든 것에 흥미가 없었고 무상한 얼굴을 자주 했다. 그가 싫어하는 건 사람이었고 그를 웃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었다. 그 외 혼자 있는 시간을, 루시는 멍하니 있거나 막무가내식 훈련으로 보내곤 했다.

게다가 이 걸레짝 같은 책은아기의 애착 장난감 정도로나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말릴 명분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라하는 당혹스러운 채로 아무거나 집어 대출증을 작성했다. 그라하의 책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설가의 두꺼운 장편이었다. (상자 속에서 유일하게 책에 걸맞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있잖아, 하고 그라하가 운을 띄웠다. 루시는 흑연으로 대출증에 이름을 써넣는 중이었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고 무심코 대꾸했다. . 그라하는 물었다. 어째서 슬픔을 남기려는 거야?

 

천장이 뚫린 추레한 궁려는 달군 모래를 뿌린 듯 더웠고, 목이 마르도록 건조했다.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사서에게 묽은 감초를 받아 마시고 있었다. 곧 구연동화가 있을 거라고 했다. 둘은 아이들의 집중을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대출증을 가지고 그곳을 나왔다. 바깥 공기는 안보다 상쾌했고 그라하는 텁텁한 숨을 쉬면서도 이야기를 탐하는 자들에 관해 생각했다.

여관으로 돌아와서 루시는 제일 먼저 창문을 닫았다. 정오가 막 지나 해가 높을 때였고, 그라하는 방 안의 그림자가 숨어드는 걸 보다가 루시에게 차를 마실 거냐고 물었다. 루시는 감초차가 마시고 싶다고 했다. 우선 루시가 마실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그리고 단 것을 원한다는 데에서 그라하는 놀랐다.

루시는 여관 주인이 가져온 뜨거운 차의 김을 냄새 맡더니 식을 때까지 그냥 두었다. 진한 작약 향기가 감돌았다. 그라하는 가져온 책에 물이 묻지 않도록 찻잔을 멀리에 두었는데, 하필 탁자 위에 햇빛이 쏟아져 있는 바람에 방 안이 유리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침대에 엎어져 있던 루시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빛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살피는 거였다.

그라하는 루시에게 크리스털 잔을 쥐여 주고 싶어졌다. 무한한 힘이 깃든, 푸르스름한 그것 말고. 진짜 유리, 사치스러울 만큼 투명한 보석 잔 말이다. (그는 원하지 않겠지, 동시에 그라하는 생각했다.)

루시.” 그라하가 물었다. “그거 재미있어?”

, 아직 신사의 정체는 모르겠어.”

내용은 또렷한가 보네.”

. 철필에 잉크를 묻혀서 쓴 거야. 얼마나 오래된 건지.”

그래보아야 몇 년 지나지 않았겠지. 그라하에게 오래라는 감각은 이제 없는 것 같았다. 그건 루시에게도 마찬가지일 테다. 혼자로서는 미련이 없는 자에게 삶은 방랑일 뿐. 마치 손가락에 닳다 못해 너절해진 책을 이고 다니는 서커스의 경로처럼.

턱을 괸 채, 루시가 이쪽을 보았다. 그라하는 심심한 내용의 소설을 뒤적거리다가 뒤늦게 그 시선을 마주했다. 루시는 어딘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다가, 평소와 다름없는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우울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 같아.”

동화책 아니었어?”

그러니까동화 속의 남자인데 우울한 거지. 그리고 신이 나와.”

어쩐지 나쁘게 들려.”

우울한 남자가 신을 소환한다면 나쁘겠지만, 그 반대인 것 같은걸.”

신이 남자를 사랑해?”

아마도.”

신사라는 낱말은 정말 여러모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고 그라하는 생각했다. 그는 루시의 말을 순진할 만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루시가 웃는 걸 의아하게 여겼다. 루시는 양피지를 접고 침대에 바로 앉았다. 그라하는 이미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고, 그래서 둘은 정중한 듯이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색한 순간이었다. 루시는 이쪽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라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

.”

아까 했던 질문 있잖아잊어도 괜찮아.”

이러는 게 말하고자 한 바와 상이한 효과를 일으킨다는 걸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미 잊었을 수도 있는데, 상기시키고 말았다. 루시는 주의 깊게 듣듯이 귀를 이쪽으로 향한 채였다. 그가 움직이는 꼬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

사실은. 그라하, 난 그 말을 이해 못 해. 관용구처럼 쓴 거야.”

, 알고 있어.”

난 그냥…… 아무것도 안 남기고 싶거든? 아니, 잘 모르겠네.”

그라하는 가끔, 자기가 루시 본인이 아닌 것, 그의 어둠이든 회색빛이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게 후회되고는 했는데, 바로 이럴 때였다. 루시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라하는 그에게 제대로 가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루시는, 자기 자신이 수복할 만큼이 슬픔만을 허용했다. 타인으로서는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그의 그림자조차 아니라면.

오직 기다릴 수밖에.

루시는 마침내 적절한 어휘를 찾은 듯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감미로운 투로 말했다.

나라면 그냥 사라질 거야.”

그러나, 천 년의 기다림은 침묵을 기를 뿐이다. 그라하는 여전히 이런 선언에 대꾸할 만한 단어를 몰랐다. , 이나 아니, 는 재고해볼 가치 없는 대답이었다. 그는 루시를 재단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시나 노래를 인용할 수도 있었다. 루시가 낭만적인 이야기에 뺨 붉히는 사람이었다면. 아주 오래된 약속을 들먹일 수 있었다. 이를테면.

, 그럼 난 너를 기다릴래.”

그런 말 할 줄 알았다는 듯, 루시는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그라하는 여전히 앉아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루시가 빙글 돌아서 책을 저리 치워버렸다. 그라하는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지적했다.

, 드린 자세 하면 허리 나빠지는데…….”

그건 네 경우고.”

그렇네…….”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영웅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가 나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약하게 여기고,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라하는 루시를 사람 취급하는 걸 그만두지 않겠지만(그것이 무엇을 초래하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지금처럼 부끄러운 듯이 실수를 정정하는 경우가 줄어들었으면 했다. 왜냐하면부끄러우니까.

루시는 늘 무심하게 착각을 가리켜 주었고, 그라하는 그때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표정이 어떻든 루시가 웃음을 터뜨리는 일은 없겠지만아니 그래서 더 부끄럽다. 생애 처음 잘못을 자각한 아이처럼. 죄악을, 책임을 처음 맛본 사람처럼 말이다.

실수는 언제나 달콤하기만 해서 입에 넣었다는 것조차 잊고 만다. 항상 같은 짓을 저지르고, 똑같이 반성하는 자기 자신에 질릴 때도 되었을 텐데. 그래, 그라하는 이것의 이름을 알았다. 그는 자기가 읽고 있던 책을 절반으로 쪼개어 기억나는 대로 들추었다. 첫 문장이 여자는 죄를 책임질 처지에 있었고로 시작했다. 이 소설을 읽은 적 있는 것 같다. 그가 잘 아는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빛이 쏟아지는 이 여관방. 언제고 돌아올 수 있는, 같은 무늬의 벽지를 한, 침대가 있는 모든 곳…… 그라하는 자기가 여기에 들어올 만한 사람이란 데에 만족하고 싶었다. 구조가 같아 처럼 느낄 수 있는 이런 곳에. 하지만 창문을 열면그라하는 창을 열었다. 나날이 다른 풍광이다. 아는 곳일 때도 있고, 지금처럼 이름 지어지지 않은 사막일 때도 있다.

볕이 너무 세다고, 루시가 투덜거렸다. 루시는 한쪽 눈을 찡그린 채 고개를 들었는데 말린 라벤더잎 같은 색깔이 과연 빛에 베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커튼이 빨려 나갔다. 작약에 감초를 넣은 진한 차향도. 더운 날 더욱 짙은 향으로, 몇 걸음 바깥엔 융단처럼 모래가 깔렸는데, 차가 식어 빠진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라하는 빙그레 웃으며 오히려 창을 멀리 밀쳐버렸다. 곧 반동과 바람이 유리창을 닫아버릴 것이다. 그 잠깐 사이에.

 

눈부시잖아.

 

방의 무엇보다 찬란한 모습을 하고서, 루시는 불평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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