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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드림&오마주 AU입니다~
나의 살을 베어 흐르는 황혼으로
네 배를 채우라
너희 화심에 오천 명 군중이 당하리라
촛불 빛이 미끄럽고 둥근 곡을 그리며 흐른다. 깨알같이 퍼진 거무스름한 모반이 살갗답게 침묵하긴커녕, 해를 굴절시키는 유리처럼 불을 더 환하게 태워 올린다. 어둠 속에서 피부가 더욱 파리해 보이는 까닭은 온몸에 점점이 박힌 그것이 미인을 뜯어먹는 개미 떼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선이 가느다란 등허리는 땀 냄새가 밴 꽃무늬 시트에서 떠올라 있고, 물렁한 매트리스가 폭 들어가도록 힘을 준 발이 몸을 공중에 지탱하고 있다. 방에서는 다 탄 초의 냄새와 느끼한 왁스와 고인 물 냄새가 난다.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란은 이 악마의 정체를 대강 유추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지친 듯 꺼끌해진 목소리가 들리자, 가브리엘라가 검보라색 입술로 웃었다. 눈꺼풀이며 입술빛이 나날이 거머리처럼 미끈하고 축축해졌다. 화장품을 지나치게 바른 것처럼 맨들맨들해 역겨울 정도로 매혹적이다. 알란이 낡은 비단으로 만든 영대를 들어 올려, 금빛 술로 가브리엘라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물기가 말라붙으며 흙이 타드는 소리와 함께 지독한 몰약 냄새가 났다. “너는 몸 내를 훔치는구나.” 자늑한 침대보를 긁던 검은 손이 튕겨 오르듯이 알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알란은 고문이라도 하듯 성스러운 헝겊을 거두어들였다. 검은 눈이 재처럼 희어진 채 가브리엘라가 속삭였다.
“선, 선생님.”
입에서 투명한 거품이 흘렀다. 땀은 조금도 흘리지 않는데 침과 같은 맑은 물이 귀와 입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된 지 얼마나 지났지. 제이크가 숨을 들이켰다. 오늘 안에 끝을 봐야 했다. 반복된 구마 의식은 가브리엘라와 알란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물론, 제이크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는 조금 전부터 의자에 앉아 향로를 뒤적거리며 소금을 고르고 재를 빼는 중이었다. 옷에 붙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면도조차 하지 않은 모습이 신학을 공부하는 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이 추레했다.
“알란…….”
알란, 이시도로 신부가 크게 움찔했다. 이름을 불리우는 건 그에게 생소한 경험이었다. 적어도, 사소한 이유로 덜컥 종의 길로 접어든 후엔 다들 블룸게이트 혹은 이시도로라고만 불러왔고, 제이크처럼 싹바가지 없는 제자가 종종 파드레 블룸이라 놀리긴 했다. 제이크가 손에서 자갈과 소금을 우수수 쏟아내며 말했다.
“흔들리지 마세요.”
“안다.”
“엄청 흔들리시는데.”
“닥쳐, 인마.”
사탄을 앞에 두고 입 놀릴 자식이니 장차 구마사제로 적합하다. 지금도, 감히 제 동생 흉내 내는 더러운 것에게 주는 시선이 형형히 결빙하고 있었다. 이제 곧 부제 서품받을 성직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눈빛이다. 게다가 입은 건 너절한 후드티에다 청바지였다. 캔버스화를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제이크가 천천히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프릴이 달린 침대 가상자리를 꾹 누르는 손길이 보여 알란은 엄격하게 말렸다.
“논나투스.”
가브리엘라가 따라 했다.
“논나투스, 논나투스…. 제이크.”
제이크 오빠. 하며 소녀가 애원했다. 눈썹이 구부러지고 미간을 좁혔다. 눈에서 찝찔해 보이는 물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물 냄새가 났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심지어 문밖까지. 처음 제이크는 이것이 피 냄새인 줄 알고 식겁해서 주저앉았었다.
그것이 열흘 전의 일로, ‘논나투스’는 점차 죽었다.
제이크가 손을 뻗었다. 향로 속 내용물로 재투성이가 된 손가락은 진한 회색빛을 띠어, 악마 들린 사람의 손길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πνεύματι ἀκαθάρτῳ” 그가 말했다. “네 이름을 말해라.” 빛이 들지 않게끔 커튼을 치고 촛불을 밝힌 실내는, 원래 방 풍경이 그러한 만큼, 장엄하다기에는 허름하고 누추했다. 가구며 벽지, 바닥재까지 갈라지고 물이 스밀 때마다 싼 자재로 바꾸어대니 뭐 하나 통일된 게 없었다. 이 궁상스러운 집에서 가브리엘라는 사흘을 혼자 견뎠다.
제이크는 그 사흘이 지난 뒤에야 사태를 접했다. 알란과 다르게.
원망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알란이 제이크의 손목을 가만히 잡아 왔다. 신부라고 해서 노동하지 않는 건 아니므로, 두텁고 거칠게 굳은살 박인 손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위협이었다. 제이크는 자기가 가브리엘라의 목을 졸랐다는 걸 깨닫고 힘을 풀었다. 그러나 사특한 표정을 지으며 가늘게 배시시 웃는 저 눈을 파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욕망이었다. 제이크는 무심결에 알란의 손길을 뿌리쳤다. 알란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말했다.
“잠깐 쉬지.”
제이크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악마의 끈적한 눈길이 제이크의 등을 샅샅이 핥았다. 알란이 성수에 젖은 손가락으로 가브리엘라의 이마를 눌렀고, 고개를 쳐들며 노려보는 그것의 콧대와 인중을 적셔 놓았다. 소금기 어린 강물의 맛이 작히나 역할 테다.
문을 열고 나가면, 저물녘이다. 내부만큼 게적지근한 다락방 풍경조차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제법 고즈넉해 보였다. 알란은 방범 장치도 제대로 안 된, 흙담에 박힌 사립문 같은 현관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이 느낌이 황혼 때문인지 요마의 짓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사람 중에 성스럽다는 그조차도.
‘신부님…….’
가느다란 목소리가 문틈으로 삐져나왔다. 알란이 이를 악물었다. 곧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는데, 담배 냄새가 났다. 제이크가 곁에서 담뱃갑을 내밀고 있었다.
알란은, 신학도인 녀석이 뻔뻔하게 일탈하는 걸 어처구니없이 보다가, 결국 받아들었다. 라이터 불빛은 지는 해보다 밝았다. 이곳에 자그마한 광원이라도 있단 게 그는 다행스러웠다.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마라.”
비록 가시가 너를 둘러싸고, 네가 전갈 떼 가운데에서 산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을 보고 떨지도 마라.”
아멘. 그들이 말했다.
이시도로 신부님의 영명축일 전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왔더니 이미 밤 열 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다행히 일터는 사제관과 가까웠다. 애초에 신부님을 통해 얻은 일자리였으니, 이것만은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래저래 답답한 걸 빼면.
꼭 이직해야지, 다시 한번 결심을 다지면서, 가브리엘라는 포장지에 리본까지 묶어 온 잼 병들을 바라보았다. 적당한 상자를 찾지는 못했지만, 오렌지, 포도, 딸기, 딸 때 이미 살짝 물러 있었던 앵두까지, 종류가 많아서 퍽 괜찮아 보였다. 물론 신부님은 포도주를 더 좋아하실 테지만─제자 된 사람으로서 그런 향락을 건넬 수야 없는 노릇이다… 라는 건 핑계고 정성에는 감동했지만 이걸 어디에 쓰나 하는 미묘한 표정이 보고 싶었다. 잼 같은 건 요리에 쓰기도 힘들고, 가브리엘라는 차라리 식빵에 케첩 뿌려 먹는 걸 선호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사실 위험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돌아가다가 시간이 더 늦어지는 게 걱정되어서, 지름길 골목으로 들어섰다. 낮이면 각종 전단과 흡연자들이 듬성듬성 들어섰다가 나갈 뿐 차가 드나들거나, 폐허로 막힌 곳도 아니었다. 여기서 납치되는 것보다 뺑소니에 당하는 게 더 그럴듯할 만큼. 가브리엘라가 든 재활용 쇼핑백에서 달그락거리며 유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기분 좋은 소음이었다.
스키드 마크 소리가 났다. 찢어지는, 강한 탄성을 가진 고무가 아스팔트에 격돌하는 소리. 그리고 질은 앓는 소리가 났다. 가까웠다. 가브리엘라는 소름이 돋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렸다. ‘스키드’가 그의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브리엘라는 비틀거리며 멈추어 섰고, 시험하듯이 벽에 어깨를 몇 번 찧어 보았다. 그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커피잔이 쓰러졌다. 손가락에 침 바르며 책장을 넘기고 있던 알란이 놀라서 의자를 당겼다. 검고 뜨듯한 음료가, 책상 모서리를 타고 방울져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일어선 알란의 얼굴이 일그러지게 비쳤다. 한숨을 쉬며 닦을 것을 찾아올 찰나, 알란은, 고개를 다시 바로 했다. 불길한 존재를 바로 보는 그의 우직한 특질이었다.
커피는 껍질을 벗겨 태우기 전의 천연 과실로 돌아가듯이, 새빨간 빛을 띠며 바닥에 고였다. 그는 인상을 쓰고 안경을 벗었다.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로사리오의 붉은 빛깔보다 저열하고, 어두운……. 알란은 희생양의 넓적다리를 태우던 불신자를 떠올렸다. 피.
오늘 찾아오기로 한 사람은 없었다. 이미 밤이었고, 그를 축하할 사람은 의례적인 이들을 제외하면 많지 않다. 그러나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는 가브리엘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괘시계가 자정 종을 쳤다.
세 번째에 통화할 수 있었다. 알란은 별일 없느냐고 물었고, 가브리엘라는 순한 어조로 그렇다고 했다. 알란은 어딘지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기분이라기에는 감각…… 짙은 사향 냄새, 산 동물의 모피에서 풍기는 기름진 악취 같은 것. 그는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제이크에게 연락했다. 가능한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연락이 닿은 건 다음 날이었다.
영명축일에 건네는 인사 뒤에 제이크가 물어왔다. “가브리엘라는 어떻습니까?” 알란은 무수히 고민한 답안을 내놓았다. 바로 사실을 말하는 거였다.
하룻밤 내내 도시를 배회하던 여성이 붙들린 건 진을 다 해 쓰러진 몸을 누군가 시체로 오인해 신고한 덕분이었다. 제이크는 곧장 달려왔다. 병원에서는 별문제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가브리엘라의 집으로 데려다준 것도 제이크였고, 와 보니 알란이 집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짓궂은 미소를 띠며 오랜만이야, 인사하면서 로사리오를 감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가브리엘라가 다시 쓰러졌다. 몸을 가볍게 받아든 제이크가 원망스레 알란을 쏘아보았다. 그가 말했다.
“참 잘도 보호해 주셨네요, ‘아버지’.”
“누가 네 애비냐.”
“제가 왜 떠났는지 아시면서 이런 일로 불려오게 만드시는군요.”
“학교에서 뛰쳐나온 건 너잖아.”
“아니었으면? 그 차고 무정한 곳에 이 애를 방치할 생각이었어요?”
알란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가 제이크를 시켜 병원에 가 보라고 한 것은, 두려워서였다. 이 일이 실재하는 사건이 되리라고 믿고 싶지 않아서. 알란은 그런 것에 이골이 났고 도피하며 신을 찾은 터였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됐다. 제이크는 그걸 알면서도 제 이기심을 마음껏 채웠다. 알란이 엄중하게 꾸짖었다.
“논나투스.”
“하.”
가브리엘라의 어깨를 감싼 손길이 움찔했다. 제이크는 안고 있던 여자를 부축해, 알란에게 맡겼다. 따끔따끔한 눈빛을 하고.
제대로 된 대화가 몇 년 만인지 알 수 없었다. 고해하고, 보속으로써 신의 종이 되겠다 선언한 제이크를 알란은 말리지 않았다. 알란은 이 젊은이, 곧 부제 서임을 받을 예정이었던 어린 종이 자신을 원망토록 놔두었다.
따라서, ‘논나투스’가 구마 의식에 보조자로 참여한 건 순전한 자의였다.
“당신이 가브리엘라를 방치했어요.”
제이크가 말했다. 알란은 담배를 거의 다 피우고, 제 몸 근처에 연기를 둘러서 체취를 없애고 있었다.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 칼날에 재를 바르는 사람처럼. 제이크는 그게 퍽 웃겨 보였다. 그는 며칠 전부터 ‘좀 더 강경한 방법’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알란은 대답 대신, “이제 들어가자.”라고 말했다. 이게 제이크의 신경을 다시 한번 긁었다.
“내가 가브리엘라를 아끼는 걸 아시면서.”
“종이 될 때는 세속을 잊는 거다.”
“그러는 당신은 전부 잊으셨어요? 아니잖아요.”
“가브리엘라는 내게도 아끼는 제자야.”
“나는…. 내게 이 아이는…….”
알란이 제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이크는, 담배가 다 타들어 간 줄도 모르고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자기가 무슨 표정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했다. 찔린 것 같기도 했고 부서진 것 같기도 했다. 저 애는 잘 알고 있다, 지금 가브리엘라는 죽어가며, 어쩌면 그보다 더하게, 영겁 동안의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걸.
“……이번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겠습니다. 저 마귀를 쫓아낼 때까지.”
“좋아.”
알란은 비로소 안도했다. 미움 당하는 걸 달가워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은 집 문이자 방문을 열었고, 물컥 끼쳐 드는 냄새를 맡았다. 느끼한 밀랍 막이 뜬 늪지대처럼 습하고 사이한 공기. 제이크가 들어오자 피식 웃던 요마는, 정복을 갖춰 입은 알란의 모습에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제이크가 그 턱을 붙잡고 얼굴을 뜯어보았다. 성수와 눈물이 섞여 말라붙은 얼굴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일종의 거부반응이었다, 어느 정도는 구마가 소용 있다는 소리였고.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아버지Padre.”
“늙은 뱀아, 네가 누군지 안다.”
알란을 부르는 목소리에 교태가 섞여 있다. 같잖다는 듯 제이크가 말을 끊었으나 알란은 귀가 더럽혀졌다는 듯 귓바퀴를 문질렀다. 채 다물지 않은 블라인드 틈새로, 석양이 들었다. 모든 것이 붉어지는 한순간이 있었다.
“아스모데우스의 미약한 사령아.”
그야말로 더러운 영이다. 제이크는 떨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이 한 번도 감기지 않고 번득거리는 사령의 눈깔을 바로 내려다보았다. 가브리엘라가, 보았다면 섬뜩해 뒷걸음질 쳤을 만한 시선이고, 그러므로 가브리엘라가 전혀 모르는 일면이었다. 제이크가 묵주를 친친 감은 손으로 가브리엘라의 목을 졸랐다. 목젖이 눌리고 울컥 피가 솟았다. 엄살은, 제이크가 중얼거렸다.
알란은 반듯한 자세로 향로를 들어 올렸다. 제이크가 잘 골라낸 정결한 나르드 향이 공기 중에서 습기를 몰아냈다. 부마자의 심경과 몸의 고통을 안정시키는 향내였다. 가브리엘라의 행동이 좀 유순해지는가 싶더니, 제이크의 손목을 붙잡았다. 알란이 말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들은 아무런 음악도 틀지 않았으나, ‘그것’은 고태한 기름을 온몸에 끼얹은 듯 몸부림쳤다. 제이크가 몸을 놓고 묶인 두 손 밑의 팔꿈치를 붙들어 눌렀다. 고통스러울 터였다. 알란은 커피잔에서 쏟아지던 멀건 핏물을 상기했다. 마음이 약해지면 가브리엘라는 죄 없이 죄지은 자들 사이에 떨어지고 만다……. 알란은, 이시도로는 가브리엘라에게 영원한 욥의 고난에 처넣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그뿐인 마음으로.
그런 간절함으로, 그는 악마의 이름을 불러냈다. 하나씩 발음할 때마다 요마는 비웃거나 미소 지었다. 제이크는 그 많은 마귀의 이름에 질려버렸다. 서른 번째 이름을 불렀을 때 움직임이 멈추었다. 조용한 와중 성물인 향로가 흔들거리며 사슬에 무게를 더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제이크가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오빠, 제이크 오빠. 제발.”
“닥쳐라.”
제이크가 오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번 더, 알란이.
너희 해하려는 마음에 오천 명 군중이 당하리라고 악마가 저주를 속삭였다. 수만 마리 기는 벌레가 내는 발소리처럼 사근사근한 소리였고, 혈육에서 나리라고는 상상되지 않는 기이한 음성이었다. 제이크가 부마자를 놓고 굳어가는 돼지 피를 가져와 와락 끼얹었다.
아, 새빨간 시각이다. 괘시계가 울리는 착각이 들었다. 시벌건 태양이 이제 막 남은 모서리를 감추고 있었다. 이 옥상에서는 모든 게 보였다. 가브리엘라는 모든 걸 본 것 같았다.
몸을 띄우고 발발 떨리는 얼굴에 진득진득한 피와 덩어리가 엉겨 있다. 요 열흘 중 가장 악귀 같은 모습을 하고서. 가브리엘라의 눈동자가 검고 심연한 빛을 띠었다. 연옥에서 돌아온 소녀가 말했다. “……아버지?”
제이크가 자세를 무너뜨렸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