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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ㅍ님

나사르 본주 2022. 7. 1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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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하우스 입구에 선 소녀

실버 그레타

 

 

회사원이란 반복적인 격무에 시달리며 시야를 좁혀가는 인간이다. 동료 에리카가 말 한 바로는 그렇다. 하지만 실버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애초에 그의 세계란 한 사람과 두 도시에 국한된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에스텔라스 그레텔, 그가 태어난 곳, 처음 일하게 된 곳……. 이런 말을 직장에서 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는 에리카와 줄지 않는 업무량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흡연하는 무리가 제각각 멘솔 담배 냄새를 피우면서 걸어 들어왔다. 맨 마지막 들어오는 이는 거드름 피우는 팀장이었다. 그에게서는 톡 쏘는 향수와 연초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향기가 났다. 대개 직원들은 그의 체취를 싫어했다. 실버는 상사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어서, 언제나 맡는 그 체취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실버, 오늘도 야근?”

옆자리 동료가 가방을 메며 물었다. 측은한 투였다. 실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조금 웃어 보였다. 동료는 부쩍 수척해진(그러나 날카로워져 오히려 잘생긴) 얼굴이 가엾다며 아래층 카페에서 산 샌드위치를 건네고 갔다. 실버는 탕비실 냉장고에 그것을 넣다가,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낮은 냉장고를 짚은 채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다.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일이 너무 많다거나, 견딜 수 없다거나, 힘들다는 말을 내놓는다면 사람들은 점점 그를 기피하고 심하게는 괴롭힐 테니까. 그에게 회사 생활은 중요했다. 청소부터 짐일까지 다 하는 마트 캐셔로 일하는 것보다야 사무원이 훨씬 편안했다. 그러나 체력과는 다른 힘이 소모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버 그레타는 단단한 인물이다. 이미 정신적 상해가 깊어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별달리 아파하지 않는다. 상처가 나면 피는 흐르겠지만, 그 정도는 그에게 생채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심줄을 갉아먹는 반복 노동이야 질리지도 않았다. 아무 생각 하지 않는 게 실버가 선택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다만, 그토록 무감한 마음을 지녀 충전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애초 닳아빠진 머릿속이었지만 바닥 긁는 속도가 회복하는 것보다 빠른 건 오랜만이었다. 실버는 피곤해하기 이전에 먼저 신기했다. 사람을 이토록 지치게 만들 수 있다니.

물론, 다 이런 건 아닐 테다. 그가 유독 과로하는 경우였다. 거래처와 생긴 조잡한 마찰도 자기 자신을 낮추어 가며 어떻게든 해결하는 데다가, 팀장의 군소리 시간을 별말 없이 견디기까지 하니 실버는 블랙 기업의 재목이라 해도 좋았다. 이직자가 신입보다 많은 이 직장에서 그가 버티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곳이 아니면, 누구도 그를 받아 주지 않을 테니까.

가출한 고아에 경력이라곤 월마트며 맥도날드뿐인, 저학력 청년을 누가 받아 주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쩌면 그저 환기가 필요한지도 몰랐다. 실버는 냉장고에 넣었던 식량을 꺼내 먹기로 했다. 잔업을 해치우면 자정 가까이에야 돌아갈 수 있을 터였고, 그는 집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에스텔은 무릎 위에 다이어리를 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무심코 거실에 들어선 실버는 에스텔이 자고 있다는 걸 알고서 머뭇거렸고, 들어서 옮겨야 할지 담요를 덮어줄지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에스텔이 인기척에 움찔했다. 깨지는 않았지만, 손에 들려 있던 당근 모양 펜이 무릎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실버는 일기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바닥에 앉았다. 소파 발치에 앉아 잠든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걷어주던 그는, 문득 미소를 지었다. 숨기려고 해도 투정이 묻어나오는 문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실버, 늦어?’

괜찮은 거지?’

난 집이야. 요리해둘게.’

마지막 문자를 본 실버는 다급하게 답장했다. 덕에 퇴근 후 참사가 일어난 부엌을 봐야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심야 라디오를 한 귀로 흘리며 돌아오는 내내, 에스텔의 당황한 낯이나 자길 기다리고 있는 망친 요리 따위가 떠올라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에스텔은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달리고 있는 무언가 같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사람.

열정이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단어였다. 그도 그럴게, 먹고 살기 위한 일에 누가 열을 올릴까, 무사히 급여가 들어온다면 그만이다. 고되었던 일은 잊히지 않겠지만, 겨우 받아낸 삯으로 딱딱한 침대,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야 하는 방과 같은 조그마한 안온을 이어가야만 하므로.

실버는 넥타이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깊은 밤 불편하게 깨어날 에스텔을 위해 진한 초콜릿을 한 잔 데워두고 싶었다. 머그잔에 쏟아진 초콜릿 알갱이에서 쓰고 농밀한 향기가 퍼졌다.

아침에 일어난 이래로 처음 맡는 냄새 같았다. 아침밥은 해치우다시피 먹고서 잠든 에스텔에게 입 맞춘 뒤 출근하고, 내내 상사의 독특한 체취를 견디어 내다가 시야가 녹진해진 몸으로 돌아와서, 겨우 긴장을 놓는 삶. 실버는 이 안전한 일상이 복에 겨운 듯 느껴졌다. 연명만이 목적이었던 예전에 비하면 행복해야 할 일이었다.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게 생겼으니까…….

초콜릿 위에 랩을 덮어두고, 실버는 조심스레 에스텔을 안아 들었다. 그를 숨 쉬게 하는 따듯한 무게를 내려놓기 아쉬워 더욱 조용히 굴었다. 에스텔은 잠들어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정신을 놓으면 무심코 진중한 무표정이 되고 마는 실버와는 영 딴판이었다. 여태 웃으며 살아왔다는 천진한 증거를, 실버는 살짝 건드려보고서 웃었다.

그는 멍하니 식탁에 앉아, 씌운 랩에 수증기 물이 맺혀가는 초콜릿을 바라보았다. 상사는 늘 다디단 커피와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는데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하는 면도가 삶의 신성한 의식인, 그저 그런 남자였다.

그에게는 헌신하는 아내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고, 늘 노성을 지르고 나서 제 자리에 앉아서는 컴퓨터 배경 화면으로 깔아 놓은 자녀 사진을 뿌듯이 바라보고는 했다. 화를 내고 부하 직원을 겁박하는 게 회사가 그에게 부여해준 적합한 역할이란 듯이.

 

오늘도 그랬다.

 

점심시간 직전이었다. 모든 직원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식사와 짧은 휴식을 고대하며 손을 놀리고 있었다. 별다른 업무지시 없이 커피잔이나 들고 사무실을 어슬렁거리던 팀장이 문득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가 결혼기념일 선물로 받았다는 명품 제였지만 차고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손목시계를 찬 팀장은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으므로 다들 방심하고 있었다.

법인카드를 들려 보낸 신입이 한 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팀장의 하루는 무척 평온할 것만 같았다.

뭐야?”

괜히 소리 높인 불평이 들려오자 사무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손목시계 팀장은 긍정적인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평화롭게 출근한 팀장은 그만큼 변죽이 들끓었다. 조그만 스크래치에도 고함을 지르는 예민한 인간이 되는 거다. 대개는 오전과 오후의 격차가 컸고, 하필 점심시간이었으며 하필이면 이때 사고를 친 신입은 애도 어린 침묵을 받아 마땅했다.

마침 신입이 땀을 흘리며 들어왔다. 커피 심부름을 보낸 것이어서 양손에는 캐리어를 가득 들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넘친 커피가 종이 캐리어를 적시고 있었는데, 그게 팀장의 변덕 날뛰는 기분에 기름을 부은 모양이었다. “!” 점심시간 십 분 전이다. 에리카가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팀장은 곧장 신입을 들볶았다. 어딜 다녀오길래 심부름을 이렇게 늦냐는 고함에, 신입이 우물거리며 길을 잃었다고 답했다. 하기야 이 근교는 빌딩촌도 아니었고 카페 한 번 가려면 사무실 밖을 빙 돌아 나가야 했다. 굳이 짬 낮은 사람을 시키는 이유가 있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거나, 손목시계를 차지 않은 평소의 팀장이었다면 따끔한 꾸중이나 들었을걸. 이젠 사무실 전체 분위기가 암담해져 점심시간이 되어봤자 나갈 수가 없었다. 물론 뻔뻔한 에리카는 선두주자가 되어 줄 테지만, 이제부터 온종일 잔소리 많은 상사와 일해야 할 것이다. 오전부터 괜스레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건수 찾는 듯싶긴 했다.

실버는 점심시간 전까지 끝내려던 일을 다 마무리한 상태로 키보드만 집적이고 있었다. 팀장의 옷이나 말투, 체취는 오래전 묻어두기로 한 어두운 일화를 자극했다. 어린 직원이 일방적으로 갈궈지는 건 어느 현장에서나 볼 수 있겠지만……. 실버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인정했다. 팀장은 얼굴과 목소리조차 모호해진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면면이 있었다.

마침내 내고픈 화를 다 부어낸 팀장이, 다 들리도록 쉰 소리를 하며 의자에 앉았다. 식사 시간인 걸 알면서 제 존재감이 사무실을 지배하는 걸 즐기는 꼴이다. 실버는 그 표정을 그릴 수도 있었다. 빈 모니터에 띄운 가족사진을 살피고 있겠지. 그게 임무라는 양 말이다.

견디다 못한 에리카가 선두마처럼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자, 나머지 직원들도 슬금슬금 식사하러 나섰다. 실버는 지갑을 든 채 잔뜩 주눅이 든 신입 앞으로 갔다. “다 가르쳐주시려고 하는 걸 거예요.” 입바른 말을 하는 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실버 자신이 불행해지기 때문이었다. 정당한 이유 없는 호통은 학대와 아주 가까우니까. “식사하러 갑시다. 팀장님께는 나중에 사과드리고요.” 사죄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실버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원자를 만난 듯 자길 바라보는 막 신입사원의 눈빛이 자기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실버는 팀장과도 몇 마디 농담을 섞었다. 순전히 상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가여운 직원들이 체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팀장은 그런 실버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젊은 시절에 자기 자신이라도 떠올린 얼굴이었다. 실버는 난 단지 멀쩡한 사람 구실을 해 보이고 싶었던 것뿐으로, 직급은 하잘것없지만 세상을 아는남직원 따위를 그리 추켜세우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히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다만, 에스텔이 이 장면을 그린다면 한 폭의 코미디가 되겠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부옇게 동이 텄다. 살금살금 방 바깥으로 나와 간단한 아침을 차린 실버는 에스텔이 쉽게 깨어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다. 에스텔도 숨 가쁜 어제를 지냈을 것이다. 오늘은 주말이었고, 집에서 처리해야 할 잔업이 좀 남아 있을 뿐이어서 실버는 느긋이 식탁 앞에 앉았다. 몸이 뻐근해 늦잠을 잘 줄 알았는데 오히려 평소보다 일찍 기상하고 말았다.

식탁 위에는 식은 초콜릿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실버는 버릴까 고민하지도 않고 래핑을 벗겨 입가에 댔다. 식어 빠진 음료는 잘 흐르지 않았고 뭉근한 냉기마저 돌았지만, 그는 그걸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어제는 유달리 압박감이 심했다. 금요일이라 더 그랬겠지.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이 모습을 에스텔이 보면같은 가정은 소용이 없다. 바로 실버 자신이 그리되지 않도록 막을 테니까. 에스텔만은 그런 숨 막히는 공기를 몰랐으면 했다. 고되고 때로는 견디지 못할 만큼 피곤하더라도 쾌적한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원하는 걸 배웠으면 싶었다. 오로지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힘들어했으면 좋겠다고실버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래도 슬슬 뭔갈 먹여야겠지. 어제저녁부터 굶었을 것이다. 실버는 슬리퍼를 끌며 침실로 들어갔다. 어느새 실버가 베고 있던 베개를 인형처럼 안은 채 잠들어 있는 에스텔이 보였다. 뺨에 난 솜털이 희붓이 비쳐드는 아침 해에 뽀얀 윤광을 드리웠다.

실버는 소리 없이 웃고 에스텔의 눈꺼풀을,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넘겨주면서는 조금 전에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도 잊고 말았다. 달콤한 음료가 제 효과를 발휘했는지도 몰랐지만.

에스텔. 일어날 시간이야.”

좋은 아침. 실버가 까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스텔의 눈꺼풀이 천천히 움찔거렸다. 저 두 눈에는 앞으로도 화폭에 펼친 듯한 정경만이 담길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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