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고 있는 것 이제 와서 구해주기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안 그래요, 리키야 씨?소우야가 말했다. 나카와타리 리키야는 말없이 소년을 거두었다. 수십 년째 뜯어고치기를 반복한 오토바이는 이제 명을 다한 듯 전봇대에 처박혀 있었고, (즉 몇십 년째 소년 취급당한) 카자나시 소우야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 ‘세월이 사람을 바꾸는 걸까.’ 이 일탈의 연유를 추정해낼 수 없었던 리키야는 무심히 넘겨짚었을 따름이다.구해 달라고 연락을 넣은 건 소우야 쪽이었다. 메시지를 잘못 보낸 듯했다. 전파도 잘 터지지 않는 곳에 있었던 리키야는, 기적에 가까운 경우로, 연락을 빠르게 발견했다. 다행히 목적지는 도쿄보다 가까웠다. 왜 소우야가 난데없이 시골 밤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게다..
봄딸기 맛은 ¿약간 스파이스! 이레는 영리한 태도로, 오늘따라 마구간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이것은 오로지 마구간지기 소녀의 낯빛이 평소에 비해 파리하다는 눈치에서 비롯된 것이지, 이레가 말의 감정과 마음을 알아챌 만큼 기민한 덕분은 아녔다. 게다가 이레는 곧 승마 수업에서 신입생들 앞에 시연 나가야 하는 몸이기 때문에, 소녀를 세심하게 눈여겨볼 기회도 구하지 못했다. 괜찮으냐, 괜찮다, 인사치레에 가까운 안부를 묻고 나서 이레는 곧 자신의 애마와 이마를 맞댔다.완곡하게 걷어차인 소녀가, 미끈한 쌀알 같은 이레의 얼굴에 아이스크림을 퍼부은 게 어제 일이다. 점심시간이었고 디저트 메뉴 중에 벨로나 초콜릿을 녹여 만든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대부분 소녀들은 밀크보다는 초콜릿을 선호했..
효율적 번제와순장 목록 “이런 거 들어본 적 있나, 배트? 네 가지 동물과 사막을 걷고 있어. 맹수, 초식동물, 애완동물, 인간.”“마지막은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지.”“하나씩 버려야 해. 그럼 뭘 제일 먼저 버릴 거지?”“초식동물.”“하하하!”손에 든 새장에는 악한의 머리가 갇혀 있다. 브루스 웨인은 물론 그것을 저버리지 못했다. 세상이 망해 모든 게 모래, 그리고 모래를 만드는 바위 폭풍뿐인 곳이 되었다지만, 이 악당에게는 버섯모양 돌 아래에 고담을 지을 만한 악의가 있었다.말하자면 브루스 웨인은 자가당착에 갇혀 있었다. '엄밀히는 사람인' 마지막 동물이 사라진 후, 이 세계에 악당이란 건 남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세계를 공허로 재봉할 마지막 인간은 브루스 웨인이다..
ㄱ. 흡연구역: 우중충한 봄이다. 우정은 천서현의 담배 상표를 흘긋 살펴보았다. 그녀는 흡연구역도 아닌 곳에 깡통이 놓여 있단 이유로(분명 재떨이 삼으라 놔둔 거라며) 곧장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불을 붙이자 콧등에 노랗게 흔들리는 빛점이 생기다가 말았다. 우정에게는 눈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천서현이 낯설었고, 무엇보다 원칙주의답게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거지.” 침음하며 웃는 저 여자 ‘천서현’이 ‘서현’이 아니라는 데에 안도감을 느꼈다. ㄴ. 필자의 마음에 관한 보고: 왜 쓰다 말았어? “천 소령님.”우정은 천서현이 들어오자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건물 옥상이라고는 하나 시도 때도 없이 라이터를 켜대는 둘 덕에 쾌적하지 못한 장소로 탈 바뀐 지 오래다. 트여 있지 않은 흡연실이었다면 줄담배를 무..
막간극인터미션 후, 3막 전 신의 처소는 낮은 곳에 있다고 했다. 에이드리안은 늘 궁금해했다. 어디까지가 낮은 거지? 저 눈동자로 가면……. 남자는 허리에 총을 차고 있었다. 한밤에 깨어나 보니 그는 이곳에 있었다. 아직 아침이 아니라는 걸 그는 금세 알아챘는데, 교회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았지만 그 장소가 불온했다는 이유로 그는 세상의 밝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이곳은 사방에 태양이 떠 있었지만 어둡고 추웠다.‘밝기’라는 건 눈앞이 환하고 그렇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어서, 그는 두통을 겪고는 했다. 지금도 그랬다. 에이드리안은 허리춤의 건벨트가 흔들리지 않도록 거기에 손을 얹었다. 바람이 불어 시야를 망치고 있었다.싸락눈이, 모래처럼 쌓였다. 조금 전에는 신발 밑창이..
허물과 미물 그는 그가 제대로 살기를 바랐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길 바랐고, 대체로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으면 했다. (물론 아무것도 이루어 주지 않았지만.) 이 소원은 너무 오래된 나머지 염원으로 부를 수도 있게 되어버렸다. 그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사랑으로 비칠 수 있다는 걸 눈치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길 뻔했지만 되짚어 생각해보니 그렇게 말도 안 되진 않았다. 조커는 사람이었고 고담시에 있었다. 배트맨이 사랑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조커는 위처럼 써서, 눈에 보이는 아무 벽에나 긴 혈서를 붙였다. 누가 구해다 줬는지도 기억 안 나는 이 골방. 벽지를 다 뜯어버린 구석탱이 방은 꽤 번듯한 저택 지하에 있었다. 조커를 사모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대다수 남자는 그를..
검은 날개 너머로 비치는 것 “이렇게 되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어요.”그가 말했다. 커피잔을 손가락에 아무렇게나 건 채였다.“나, always imagined about… happiness.”화빈은 그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온실 안은 좁았고, 가로보다 세로 너비로 길었고 늦봄인지라 훈훈했다. 마치 발굴된 잠수함이나 간헐천 때문에 지상으로 올라온 관처럼. 단지 유리로 되어 있다는 사실만이 그것과 달랐고 화빈은 생각해본 적 없는 이 문제가 퍽 즐거이 느껴져 웃었다.매켄지가 움찔하며 미소를 지웠다. 입김에 날리는 실낱보다 가늘게 바뀐 표정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화빈은 아, 하며 다시 남자를 보았다. 화빈이 말했다.“못 알아들었어요.”“이건 쉬운 영어였는데. 이지 랭귀지.”“저는 학생이 아닌걸요..
관객의 끈기 “야 영화 찍어볼래?”“오 그래!”“……뭔지는 안 물어봐? 됐어, 내일 시작해.” 때는 Z가 트레일러 공동생활을 할 때였다. 그 공터는 너무 늙어 소리도 제대로 못 듣는 백인 외골수의 것이었는데, 명목상 사유지이기는 했으나 해당 노파가 너무나도 비협조적이어서 인근 공무원들이 전부 포기한 상태였다. 그리고 급진 중에서도 급진사상을 가진 히피들이 여기 자리를 잡았다. 주민들은 백인 집주인이 불쌍하지 않냐며 침을 뱉었는데, 동시에 외곬에게 먹을 걸 가져다주거나 말도 걸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이기도 했다. (아니, 이건 그냥 Z의 생각뿐일지도 모르지만.)그는 트레일러 세 대가 나누어 가진 깨진 거울 조각에 양치 거품이 튄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두었다. 입에서 거품을 ..

마키마는…… 화장실에 있다. - 스산한 이야기가 어울릴 법한 밤이었다. 마키마는 문득 여러 가지 삿된 속설을 나누며 심심풀이하던 과거를 떠올렸다. 죽기 전의 일이었고 이젠 그럴 사람도, 괴담으로 잊어야 할 기기한 세계도 남지 않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널 죽일 수도 있었어.” 선아는 즉시 대꾸했다. “지금도 할 수 있잖아요?” 아직 소녀 같기만 한 이 여자는 옆자리에 누워 있었다. 마키마가 온 뒤로 줄곧 침대를 내어주다가 처음으로 함께 잠드는 날이다. 둘 중 누구도 오늘이 기념할 만한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애초, 그렇게까지 오래 함께 있게 될까?),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을 만큼 침대가 좁아서, 이렇게 무방비해지기 직전 타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는 놀라워하고 있었다..

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메멘토란… 최후의 영약이다. 가나슈를 발명한 조리사처럼, 실수로 이 약을 개발하고 만 연구원은 그 즉시 처분했다. 재이의 손으로. 그나마 일인자의 손속에 처단당한 것이 배려이며, 이후 메멘토가 밟아갈 살육의 길을 생각했을 때는 영광이기까지 하다. (재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거의 문학에 가까운 보고서를 받아 본 재이는 회의를 소집했고, 적극적으로 이 약의 쓰임을 밀어붙였다. 헤로인에 섞인 유릿가루보다 덜 저급하지 않으냐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물론 돈줄이 권력의 척도인 N.E에서 재이의 말은 잘 먹혀들었다. 처량한 문인처럼 죽음을 기다리던 연구원이 올린 보고서는 재이가 손수 불태웠다. 그 작용 기전이 머릿속에 들어 있으면 끝인 데다가, 완성품을 처음부터 연구하는 게 이 ..
물 발자국 춤곡 누군가는 여전히 윤준에 관해 떠들었다. 그의 가장 최근 면면. 마지막 음계를 삐끗했던 연주회 말이다. 집무실에 앉아 인터넷 기사나 보며 시간 때우던 태주는 짜증스러운 손길로 창을 껐다. 고개를 돌리면 아직 한낮이었다. 점심시간이 막 끝난 나른한 무렵. 비서가 무심하게 끓여 둔 커피 향기가 집무실을 채우고 있었다. 벽에 덧댄 호두나무 패널에서는 새로 기름칠한 냄새가 났다. 보통 사무실에서 날 법한 잉크와 에이포용지가 맞닿는 석유 냄새 따위는 없어 태주는 더 맥이 풀렸다. 그는 윤준의 콘서트라고 하면 단독이든 합주든 간에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저녁이라면 개인적인 일정을 빼는 걸로 해결했고, 낮에는 대체로 ‘외근’이라는 핑계를 썼다. 아무리 샛별 피아니스트래도 거쳐 가는 지방공연이나 어린이를 ..

이런 물음을 들은 적 있다는 걸 미는 겨우겨우 기억하고 있다. “술담배는 언제부터? 약은 누굴 통해?” 미는 대답했다. “몰라.” 적확한 이야기 대신 밀가루와 질 나쁜 초콜릿을 미는 요구했다. 그럼 사람들은 거기까지는 용인하는 듯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곳에서 ‘빵을 만들고 싶다’라고 하면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와 좋은 초콜릿을 준다. 그리고 전체 수용 인원에 나누어 먹을 만한 초콜릿 머핀을 만들라고 했다. 머핀? 멍청한 선택이라고, 미는 생각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세 시간 후에는 침대 구석에 처박아둔 베이킹파우더 봉지를 보고, 여기에 LSD를 숨겨놨었나 고민했을 뿐이다. 초콜릿이 손바닥에서 녹아내렸다. 약일 리가 없지. 미는 고작 두 시간 전 안정제를 투여받았고 구강으로 흡수되는 내복약 종류는 제한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