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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딸기 맛은 ¿약간 스파이스!
이레는 영리한 태도로, 오늘따라 마구간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이것은 오로지 마구간지기 소녀의 낯빛이 평소에 비해 파리하다는 눈치에서 비롯된 것이지, 이레가 말의 감정과 마음을 알아챌 만큼 기민한 덕분은 아녔다. 게다가 이레는 곧 승마 수업에서 신입생들 앞에 시연 나가야 하는 몸이기 때문에, 소녀를 세심하게 눈여겨볼 기회도 구하지 못했다. 괜찮으냐, 괜찮다, 인사치레에 가까운 안부를 묻고 나서 이레는 곧 자신의 애마와 이마를 맞댔다.
완곡하게 걷어차인 소녀가, 미끈한 쌀알 같은 이레의 얼굴에 아이스크림을 퍼부은 게 어제 일이다. 점심시간이었고 디저트 메뉴 중에 벨로나 초콜릿을 녹여 만든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대부분 소녀들은 밀크보다는 초콜릿을 선호했고 그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이레는 흰색이 좋다는 단순한 이유로 밀크 아이스크림 콘을 들고 있었는데, 컵에 든 초콜릿이 얼굴로 날아오며 콘에 남아 있던 밀크가 덩달아 떨어졌다. 이레는 얼굴에 똥이 묻은 채로(그 광경을 본 모두가 ‘똥이다’라고 생각했으니) 셔츠 앞섶은 부연 우유로 젖은 해괴한 몰골이 되어버렸다. 곧 곁에 있던 수족들이 생난리를 치며 온갖 손수건을 건네긴 했다만, 얼룩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없던 때처럼 돌아가긴 힘든 법이다. 이레는 창백한 얼굴로 도망쳤다. 화장실에서 셔츠를 북북 빨아대는 경험 따위, 그에게는 없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이런 천로역경의 길, 극복해야 마땅하다. 이레는 지도 선생에게 부탁해 승마 수업을 다음 날로 앞당겼다. 그의 자존심을 복구시켜줄 ‘무언가’가 시급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고, 이레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로 말의 콧잔등에 입 맞춰주었다.
백마는 평소같이 유순했다. 가볍게 푸릉거리는 걸 빼면 자기표현이 없는 성격의 이 애마는 각설탕을 찾아 분홍빛 코를 디밀 뿐이었다. 이레는 “착하지,” 웃으며 각설탕 서너 조각을 먹여주었다. 아마 이 짓이 백마의 흥분을 대폭 끌어올렸을 것이다. 지나친 당분에서 기인한 도파민 말이다.
아니면 설사약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시연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멋들어진 모양새를 요하기 때문에 외부 수업에 속했다. 보통 학생들은 잘 고른 흙이 깔린 승마장 트랙에서 낮은 장애물을 넘어가며 수업하지만, 이레의 경우 매우 숙련자에 속했고, 선생의 지도하에 잔디밭을 밟기도 했다. 넘어져도 소녀들의 무릎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잔디는 말발굽과 상성이 나쁘다. 승마감도, 제어 방식도 미묘하게 어려워지기에 이레 또한 외부 수업에는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또 입시 홍보 포스터 사진을 찍는 겸사겸사의 현장이기도 해서, 이레와 학교 측에게는 아주 요긴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레는 가진 것 중 가장 오래되고 익숙한 안장을 선택했다. 등자를 밟아 오르면 머릿결이 가볍게 휘날렸고, 경마를 구경하듯 멀리 떨어진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소녀들이 자그만 탄식을 흘렸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오후 두 시였다. 배부르고 무더운 초봄의 낮. 이레의 머리카락은 가장 빠른 말에게 먹이는 건초처럼 금빛이었고, 햇살을 담뿍 머금어 지독하게 반짝거렸다.
백마에 올라탄, 백정장을 입은 이레. 신입생들의 눈에 이 희디흰 학생회장은 거의 천사에 버금가는 기적이었다. 거의 모든 부의 부장을 맡았지만 승마부 오디션은 특히 치열했다. 이 광경을 매일매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덕분이었다. 이레는 쇼맨십을 발휘해 신입생 쪽에 손을 흔들어 주었고, 고삐를 붙잡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잘 들리도록 소리 높여 설명해주었다.
“절대로 고삐를 놓아선 안 됩니다!”
말을 처음 타는 학생이 겁먹지 않되 조심할 수 있게끔 이레는 기본적인 동작을 시연했다. 느린 걸음에서 경보로, 그리고 장애물 구간에 들어서서 허들을 뛰어넘을 때였다.
시연에 사용되는 장애물은 실내에서 쓰는 것보다 조금 높았다. 물론 외부 강습 시 ‘더 멋져 보이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터였고 이레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백마는 익숙한 높이에 취해 '외부 강습'임을 잠시 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상기후 때문에? 계절을 감안하면 지나친 기온에다 땡볕이었다. 학생들은 반쯤 꿈을 꾸는 기분으로 이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낙마했다
는 걸 그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누군가 짤막하게 비명 지른 덕이었다. 지도선생조차 멍하니 보고 있다가 조금 늦게 달려왔다. 백마는 바싹 깎아 비린내 나는 풀밭에 분변을 싸질렀다. 소녀들은 낙마한 왕자보다도 짐승의 똥을 목격한 것에 충격받았다. 이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필 초콜릿 사건 다음 날이었다. 왕자님의 이미지를 구정물로 먹칠하기에 이보다 좋은 시기는 없었다!
몸과 마음의 쇼크로 기절한 이레는 한 시간 뒤 눈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하얀 천장과 소독약 냄새라는 고전적인 이미지가 그를 덮쳤다. 특별히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몸 이곳저곳이 놀란 듯 욱신거렸다. 설마, 설마…….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그에게는 이것이 무지하게 큰 부상이다) 병명조차 없어 이레의 이름이 붙을 법한 난치병이라도 발견된 걸까? 아니고서야 (웬만한 병상보다 준비 잘 된)이레의 침실이 아닌 병상에서 눈떴을 리 없었다.
“병원이어요. 의사는 갔어요.”
그런 마음을 알아챈 듯, 보드라운 목소리가 설명해주었다. 소로였다. 이레는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소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일 소로였다면,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무방비하게 보였다는 사실에 끔찍이 수치스러웠을 거고, 그걸 노리며 이곳에 남은 거였다.
하지만 이레는 홀로 남아 무지와 공백에 짓씹히는 게 더 두려웠다. 누군가 있다는 건 그가 자신을 도와줄 준비도 되어 있다는 거였다. 적어도 이레의 세계는 그랬다. 때문에 이레가 사르르 웃으며 손을 내밀어왔을 때 소로는 뒤늦게 충격받았다. 사실 이레가 낙마했을 때의 다급한 마음이 안도감과 함께, 느지막이 밀려온 거였지만… 소로는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첫눈에 반했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긴 했으니까.
이레가 말했다.
“아아, 공주님이…… 나를 구해줬구나.”
물론 이레를 업어들고 옮긴 건 선생, 치료한 건 의사, 경과를 지켜본 건 간호사고 소로는 졸졸 쫓아다니기만 했지만, 아무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레는 눈물이 날 것 같아 화사하게 웃었다. 실제로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조그맣게 맺혔다. 그가 말했다.
“내게 입 맞춰 깨운 것도 공주님인가?”
그런 짓을 할까 말까 고민하긴 했지만 잘 참았다. 소로는 죄책감 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한 시간밖에 안 지났으니, 온전히 자기 힘으로 회복하신 거여요.”
“꼭 백 년이라도 지나간 기분이야.”
“당이 떨어졌을지도 몰라요.”
“응.”
이레는 고개를 들어 맞은 편 선반에 놓인 예쁜 사탕 그릇을 바라보았다. 가져다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소로는 또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소로는 직접 씻어서 가지런히 꼭지를 뗀 딸기 접시를 들어 올렸다. 여태 무릎에 놓고, 과실이 무르기 전 이레가 깨어나기를 기다린 터였다.
(그러니…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단 건 거짓말. 이미 오후 너덧 시였다. 백 년은 아니지만 두 시간은 거뜬히 지난 때다.)
쓰디쓴 병 뒤에 먹는 달곰한 과일이야말로 유혹의 필요 조건. 왕자님에게는 더 잘 먹혀들어서, 딸기를 본 이레가 눈을 크게 떴다. 격자 모양으로 연유를 뿌린 붉고 흰 딸기 과육은 몹시 유혹적이었다. 게다가 마침 오후 세 시, 볕이 서편으로 기울어진 때여서,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햇살 아래의 과육은 신성한 음식처럼도 보였다.
물론 이레에게 그랬다는 소리다. 이레는 낯선 공간에서 몹시 스트레스받고 있었으므로 모든 걸 과장되게 느꼈다. 소로는 그냥, 프롬 파트너에게 선물하는 초콜릿 묻힌 딸기 같은 걸 생각했을 뿐이다. 소로가 포크에 그걸 찍어 들고 “아,”하라고 했다.
이레는 신이 내린 술잔을 받들듯 순순히 입을 열었다. 최상품 딸기의 달달 상큼한 맛이 입안에 톡 퍼졌다. 그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깜짝 놀란 심정을 진정시켜줄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공주’ 소로가 자길 보살펴주고 있다고 믿었다.
이레가 물었다.
“나… 심각하지 않은 거지?”
애 같은 목소리에, 소로는 설핏 웃고 대꾸해주었다.
“물론이죠. 조금 쉬기만 하면 깨끗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그러셨답니다.”
의사 선생은 테니스 라켓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 없는 왼팔을,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짚으며 이렇게 말했다. ‘으스러졌네요. 수술해야 할 겁니다.’ 수술은 빠르게 끝났고 봉합한 상처는 붕대로 가렸다. 자기 팔을 보고 비명 지를 이레를 위한, 소로의 지시이자 배려였다.
연유와 설탕, 샤워 거품처럼 청결한 하얀 크림으로 무장한 딸기가 하나둘 이레의 입으로 들어갔다. 단것을 먹고 기운 차린 이레는 볼을 붉혔다. 그는 입가에 흰 생크림을 묻힌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쩌지, 그런 모습을 (거의) 전교생에게 보였으니…… 아, 공주님. 나는 이제 어쩌면 좋아? 전과 똑같지는 않을 거야.”
“괜찮아요, 이레 님. 모두 염려스러워할 뿐이었답니다. 아무도 당신을 다르게 보지 않을 거여요.”
새빨간
딸기처럼 시뻘건 거짓말. 학교 전체가 수런거리고 있다는 걸 소로는 철저하게 숨길 생각이었다. 입원 날짜를 미루고 매일 같이 학교 이야기를 지어내서라도. 이레 님을 위해서라면 그까짓 작당모의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다행히 소로에게는 상상력과 집념이 넘쳤고 이레에게 들려줄 사랑 고백은 많이 남아 있었다. 이레가 물어보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대신, 어물쩍 넘기며 사랑스러운 낱말만 조합해주면 될 일이었다.
소로는 순수하게 세뇌를 망상했다. 나쁜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닌 데다가, 소로와 같은 미소녀를 의심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 완전범죄, 아니 완벽한 계획이 될 터였다. 소로는 손을 뻗어서, 자상하게 이레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연유 묻은 손가락을 자기 입에 쏙 넣고 잠깐 빨았다.
이레는 기이한 의구심조차 포착하지 못했다.
소로가 말했다.
“이레 님을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즉결 처형하겠어요.”
“하하, 농담도. 그렇게까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들 착한 소녀들이란다.”
‘농담이 아니어요. 뒷산에 묻는 한이 있어도 당신을 욕하는 건 용서 못 해’라고 소로는 생각했지만, 현명하게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내 왕자님이 망가지는 건 오로지 내 탓이어야만 해’라는 말도 감추었다.
때문에, 이레의 병실에 들르고 싶어 하는 무수한 소녀 중 소로만이 선택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악의에 가까운 사심을 무척 잘 숨기는 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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