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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적 번제와 순장 목록(23.04.20)

나사르 본주 2024. 8. 19. 09:42

효율적 번제

순장 목록

 

 

 

 

이런 거 들어본 적 있나, 배트? 네 가지 동물과 사막을 걷고 있어. 맹수, 초식동물, 애완동물, 인간.”

마지막은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지.”

하나씩 버려야 해. 그럼 뭘 제일 먼저 버릴 거지?”

초식동물.”

하하하!”

손에 든 새장에는 악한의 머리가 갇혀 있다. 브루스 웨인은 물론 그것을 저버리지 못했다. 세상이 망해 모든 게 모래, 그리고 모래를 만드는 바위 폭풍뿐인 곳이 되었다지만, 이 악당에게는 버섯모양 돌 아래에 고담을 지을 만한 악의가 있었다.

말하자면 브루스 웨인은 자가당착에 갇혀 있었다. '엄밀히는 사람인' 마지막 동물이 사라진 후, 이 세계에 악당이란 건 남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세계를 공허로 재봉할 마지막 인간은 브루스 웨인이다. 그는 박쥐이기도 하다.

조커는 배트의 생각을 읽었다. 그는 땀을 뚝뚝 흘리는 팔뚝 끝에 매달린 채 말했다.

자살도 살인인가, 브루시?”

헛소리 마라.”

내가 죽지 않아서 속상해?”

아니면 그 반대야? 물론 브루스는 여기에 대꾸하지 않는다. 헛웃음이라도 지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웃지 않는다. 범죄를 척결하는 여엉.” 은 웃음의 실마리조차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아니다. 사실 배트맨은 조커가 웃는 남자이기 때문에 폭소할 수 없다.

브루스아니, 배트맨은아니브루스 웨인은 요즘 쾌걸 조로가 상영되는 꿈을 꾼다. 아이맥스 크기의 거대 스크린에 앞서 18세기 오페라 극장 같은 시벌건 막이 내려와 있다. 꿈속에서는 냄새를 맡지 못하므로 어린 브루스는 그게 피인지 물감인지 알 수 없다. 연석에 앉은 어른 브루스는 물론 피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갈라서 봉합해야 할 돼지 뱃가죽처럼 여기지 않는 한 어떻게 그런 붉은색이 존재하겠는가?

브루스는 잠시 멈추어 선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보인다’. 모래 폭풍이 다가올 것이다. 광활한 사막에서는 하루나 이틀 후에야 당도할 바람 따위가 미리 포착되고는 한다. 그리고 브루스는 그럴 때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 너머로 조커를 집어 던지고 싶다.

브루스가 주먹 쥐자, 이 박쥐 사내를 열심히 올려다보던 조커가 신음한다. “아야야. 살살 하라고.” 엄살을 넘어서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살갗을 당기는 데에 고통을 느꼈다면 조커는 이미 미쳐버렸겠지. 아니면 몸뚱어리가 살아 있을 적 미처 정신머리를 잡지 못해서, 불명예스러운 불멸을 누리고 있는 것이거나.

하지만 배트맨은 자신이 조커의 머리채를 쥔 줄 알고 놀란다. 그가 시선을 내리면, 하도 올려다보느라 공막 너머로 넘어갈 듯 깜빡거리는 초점의, 핏발이 선 눈알 두 점이 마주 본다. 조커가 경박하게 웃는다. 모래바람이 동굴 바깥을 긁는 소리 같다.

브루스는 자신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조커는 왜 머리만 있는 거지? 뒤늦게 떠올린 의문에 대답해주는 것도 영혼의 한 쌍 같은 이 악한이다. 그가 말한다.

난 내 의지로 여기에 있지. 너도 마찬가지고. 알고 있지 않나?”

그럴 리가 없다. 배트맨은 조커가 멋대로 떠들게 둔다. 조커는 신이 나서 지껄인다.

나는 거짓말을 하진 않아. 널 속이고, 조종하고, 이용해 먹고. 또 사랑하긴 하지만!”

끔찍한 말. 진실이라는 걸 알기에 더 잔혹하다. 배트맨은 이런 방식으로 여러 번 죽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조커가 깍깍거리며 웃는다. 아니다. 이건 진짜 까마귀 소리. 모종의 이유로 참수당한 후 거두어진 왕의 유해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조커가 구연한다. “쾌걸 조로는 왕국을 세운 다음 죽어버렸어.”

네 유년기의 비참한 히어로가 말이지, 결국 왕이 되었다고. 왕이란 건 기본적으로배트맨이 대꾸한다.

여기서 불을 피우지.”

조커가 빙그레 미소 짓는다. 조금 기이하지만 가련하고 현명한, 중년 남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하지만 아주 잠깐의 착각일 뿐이므로 브루스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그는 브루스 웨인이었다.

배트맨이 아닌 이상 대답할 필요 없다. 그는 조커를 내려놓지 않은 채 가시덤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말라 죽은 이파리와 잎맥만 남기고 갉아 먹힌 가시나무를 구한다. 제대로 된 장작처럼 패 놓을 힘이 없기에, 그것들은 잉걸불이 잦아들 때까지 완전히 타지는 못할 것이다.

브루스는 자신이 나무의 숙명을 죽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짓을 한다. 불을 붙이는 일.

뒤퐁 라이터에는 아직 가스가 가득 남아 있다. 조커는 이 라이터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도련님스럽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유로 브루스는 뒤퐁 라이터를 선택했다. ‘지나치게 브루스 웨인 답기 때문에조커가 이걸 덜 좋아하고, 또 덜 웃고.

브루스의 벗은 발등에 검댕이 묻어 있다. 자세히 보니 말라붙은 거머리다. 물가에 간 기억이 없다. 조커가 불 아지랑이 너머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아무 이유 없는 빈 깡통의 웃음이다. (브루스는 애써 생각한다.)

그게 문제야.” 조커가 말한다. “브루시너는 언제나 생각해야만 하지.”

브루스는 근육질의 거대한 몸을 웅크린다. 피딱지가 생기기 시작한 발을 곱고 흰 모래에 깊이 묻는다. 밤이 되기 전 온기를 다 훔쳐야 한다. 머리는 체온을 보존할 만한 생체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아, 다음 날 아침 싸늘하게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브루스는 모래무지처럼 잠긴 자신의 발등 윤곽 위에 조커를 올려놓는다. 조커가 기분 좋게 신음한다. 브루스도 썩 나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마치.

그는 생각을 관둔다. 조커는 드물게도 입을 다물어준다. 천연덕스럽게 입을 찢기는 하지만. 조커가 말한다.

뱃시너도 알면서.”

…….”

내일 아침이면 나는 죽는다구.”

브루스 웨인은, 죽음이란 낱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처럼 입술을 살짝 벌린다.

인간.”

조커가 말했다.

내 자기는 인간을 제일 먼저 버리겠지. 자기 손으로 죽여줄 수 없는 동물이니깐!”

 

조커의 뺨은 땀으로 젖어 있다.

 

이봐, 뱃시.”

…….”

자기?”

…….”

드디어 미친 거야? 아니면 내게서 다른 걸 보는 거야?”

너는 인간이야.”

 

브루스가 말했다. 분과 땀과 넓어진 모공으로 분화구처럼 번질번질한 뺨에 서늑한 푸른 빛이 돌았다. 조커는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다음에 이어질 말을 별로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루스는 친절함을 발휘하여, 이렇게 말했다.

마더구스군,”

고래고래 부르던 노랫소리는 갑작스럽게 뚝 끊겼다. 폭풍이 예상보다 이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사구에는 메아리가 부딪히지 않기 때문에, 조커는 마음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었다.

즐거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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