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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메멘토란… 최후의 영약이다.
가나슈를 발명한 조리사처럼, 실수로 이 약을 개발하고 만 연구원은 그 즉시 처분했다. 재이의 손으로. 그나마 일인자의 손속에 처단당한 것이 배려이며, 이후 메멘토가 밟아갈 살육의 길을 생각했을 때는 영광이기까지 하다. (재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거의 문학에 가까운 보고서를 받아 본 재이는 회의를 소집했고, 적극적으로 이 약의 쓰임을 밀어붙였다. 헤로인에 섞인 유릿가루보다 덜 저급하지 않으냐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물론 돈줄이 권력의 척도인 N.E에서 재이의 말은 잘 먹혀들었다. 처량한 문인처럼 죽음을 기다리던 연구원이 올린 보고서는 재이가 손수 불태웠다. 그 작용 기전이 머릿속에 들어 있으면 끝인 데다가, 완성품을 처음부터 연구하는 게 이 ‘실수’를 처리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터였다.
연구원은 ‘메멘토’를 써서 자살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마지막 자존심인 모양이지. 재이는 경쾌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싫어.” 총성이 울렸다. 그는 피 묻은 가죽장갑을 바깥에서 대기하던 비서에게 넘기고, 일기장과 연구 파일을 직접 들고 귀가했다. 이걸 파벨이 안다면 좋아하겠지… 필사적으로 달려들려나? 음흉하게 웃기도 하면서.
그러니, 결코 네게 쓸 생각은 없었어.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은 손에 들어온 물건의 가능성을 단숨에 재보는 타입이었다. 가치가 없으면 버렸고, 조금이라도 숨 붙일 수 있다면 거칠게나마 써먹었다. N.E가 지금처럼 우아하지 못한 집단이 된 건 그의 이런 버릇을 물려받은 공산이 컸다.
파벨은 식탁에 덩그러니 올라와 있는 찻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 없는 물건을 죄 치워 놓고 하얀 도자기 찻잔 한 조만 있는 걸 보니, 원이 또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만, 아무 말 없이 빙글빙글 웃고 있어 전혀 추측할 수가 없었다. 벽에 기대어 팔짱만 끼고 있던 원이 드디어 미소 진 입을 열었다.
“왜 안 마셔? 독이라도 탔을까 봐?”
“아뇨.”
굳이 거짓말하는 건 몸에 배긴 습관이다. 이런 사소한 데에서 자존심 세울 필요 없다는 걸 아는데도. 파벨의 몸은 덧없는 죽음 여러 차례와, 고전 암흑가의 고위 신분이라는 필멸적 직함을 가진 특이한 사례였다. N.E의 사람인 원 앞에서 이러한 종류의 품위라도 지키지 않으면, 영혼이 말살되리라는 본능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것이 비단 파벨만의 성질은 아니리라.)
분명 독을 탔을 것이다.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파벨은 태연하게 손가락에 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원이 집어치우지 않았다면 그대로 쭉 들이켰을 것이다. 그래도 이미 반쯤 마신 뒤였다.
박살 난 찻잔이 벽에 불그죽죽한 얼룩을 남겼다. 희석된 핏물을 터뜨린 것 같은 자국이었다. 산산조각으로 나뒹구는 도자기를 보다가, 파벨은 무기질 같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원이 속 모를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파벨이 말했다.
“뭘 원합니까.”
“살벌하게 굴지 말고.” 파벨은 여태 살벌한 짓을 한 건 당신이라고 말대답하고 싶어졌다. 원이 덧붙였다. “이것보다 재미있는 걸 준비했지, 자기야.”
몸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한 번 죽는구나, 파벨이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 자기 집 침실이라는 게 이렇게 놀라울 줄은. 사실 매번 호텔이었지만, 파벨은 가끔 지하실에서 정신을 차릴지 모른다고 여기고 살았다. 원은 애초에 진심이랄 게 없는 인간이니 경계할 필요가 둔하지만… 언제고 간부급에 들켜 끌려갈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파벨은 본분을 잊은 적 없었다.
저 남자는 놀랍게도, 파벨 자신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은 듯했고.
원이 침대 발치에 앉아 그린 듯이 웃고 있다. 파벨은 몸을 일으키기 위해 팔을 움직이려다가 상체만 기우뚱했다. 굵은 두 손목이 묶여 있었다. 딱딱하고 가칠가칠한 질감을 보건대 값싼 케이블타이를 몇 겹으로 조여 놓은 거였다. 게다가 영악하게도 팔꿈치까지 포박했다.
말하자면 파벨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인질처럼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고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독한 수면제 기운이 남아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가만히 있는데도 천장이 막 멈추어 가는 선풍기 날개처럼 빙빙 돌았다. 원이라는 저 남자의 눈가가 신호등처럼 푸른 안광으로 젖어 있는 듯했다. 곱게 가루 낸 아스피린처럼 희디흰 잔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기야,”
라고 원이 말했다. 그가 주사기를 들고 있다는 걸 파벨은 조금 늦게 깨달았다. 가느다래서 잘 보이지도 않는 은빛이 주사기 끝에서 반짝거렸다. 피스톤을 눌러 투명한 물약을 분출시킨 듯했다. “최후의 영약이래. 멋지지?” 적어도 파벨의 머릿속에서 ‘최후’란 보루가 아닌 죽음이었다.
평소처럼, 수면제 농도를 짙게 해서 독살해도 됐을 텐데. 파벨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잠에서 깨어난 건지 죽음에서 깨어난 건지도 불확실한 지금 원의 행동은 불필요한 팬서비스 같았다. 죽는 것이 보고 싶다면 저렇게 친절한 말을 해주지 않아도 된다. 파벨이 죽음의 공포에 떨지 못하는 사람이란 것도 저 치는 이미 알았다.
그는 즉시 이 ‘최후’가 무엇을 일컫는지 알아챘다. 파벨을 위해 개발한 신약일 것이다. 진짜로 죽거나, 아니면 미쳐버릴 만큼 고통스러울 테고 파벨은 저 바늘에 팔뚝을 내어 준 직후부터 삶을 송두리째 잃게 될 것이다.
그는 조금 더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원이 계속 말했다.
“이름은 ‘메멘토’래. 이상하지? 널 죽여버릴 독의 이름이 기억이라니.”
“…불사하는 약의 이름은 ‘모리’입니다.” 파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걸 이야기해줘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는 결국 말했다. “‘죽음’이라는 뜻이지.”
원은 웃었다. 그가 침대 위를 천천히 기어와 주사기를 자세히 보여주었다. 파벨의 눈앞에 디밀어진 숫자는 컸다. 저 용량을 한 번에 투약하면 그게 뭐든 죽는 게 마땅하다. 일순 파벨은 웃음과 분노밖에 모르는 듯한, 저 능청능청한 사내가 안타까워졌다. ‘당신 지금 두려워하고 있어.’ 파벨이 생각했다.
아니, 지나친 기대일지도. 파벨은 즉시 마음을 접었다. 원이라는 남자는 상상 이상의 쓰레기니까. (그래야만 했다.) 파벨은 주요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죽는다고 해서 조직이 털리지는 않는다. 죽음이란 고문보다야 달가운 것이었다. 마치 달콤한 맛을 내는 검은 재처럼.
그는 결심을 세웠다. 이 자리에서 당신 손에 죽음을 맞이해야지.
아무것도 흘리지 않고,
누구도 다치지 않게. 그리고 당신 손에 묻은 피 한 방울로 영영 남을 수 있게끔…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서글퍼져, 파벨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발끈한 원이 멱살을 쥐어 채고 경동맥에 바로 바늘을 꽂았다. 차가운 약물이 혈관으로 투사되는 동안 그들은 깊이 입 맞췄다. “사랑해.”
오가던 숨이 마른기침 한번 없이 사그라졌다. 원은 여태 뜨여 있는 파벨의 금갈색 눈동자 속에서, 빛을 잃은 태양을 본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고서, 재이는 즉시 반문했다. ‘그럼 뭘 바랐어?’ 손을 털 것도 없었다. 묵직한 몸뚱어리가 품 안으로 쓰러졌고 재이는 시체의 팔목에서 케이블타이를 재껴 풀었다. 후처리는 부하가 맡을 터였고 그는 이 자리에서 유유히 빠져나가면 되었다.
발걸음을 붙드는 건 가슴팍에 남은, 덜 날아간 시체의 온기… 약을 섭취한 탓에 조금 차가운 듯한 체온. 형용키 힘든 온도의 맛이 그를 자꾸만 불러세웠다. 재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해서 뭐 하려고. 아니, 나는 이치가 그리운가?
조직 간에 전쟁이 발발하겠지. 파벨의 자리가 비어 최적의 상태겠지만 가니메데의 열의도 만만찮을 것이다. 간부가 죽었으니 그 부하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겠고, 자칭 ‘형제’라는 나머지 것들도 마찬가지, 도시의 그림자를 책임지던 자들이 혼란하니 일개 시민조차도 공기가 불안함을 느낄 거였다.
단지 그뿐이다. 재이는 마지막 얼굴을 떠올렸다. 파벨은 끝까지 울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인제 와서는 아무도 몰랐다. 재이는 몇 번이고 파벨을 ‘진짜’ 죽이는 상상을 했었다. 이 ‘메멘토’를 손에 넣은 뒤로 정말이지 몇 번이고… 삿된 상상력 속에서 파벨은 분기탱천해선 매번 울음을 터뜨렸다.
‘걘 날 좋아했으니까.’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적 없다. 아무리 오고 가는 게 있다지만 사랑이 아니고서야 그런 눈을…… 눈으로 마주 볼 리 없으니까, 그러니까 파벨 마르시아 프레더릭은 재이 데이를 사랑한다.
재이는 허물어지듯 얼룩진 부엌 벽 앞에 앉았다. 하얗고 북슬한 귀가 뒤로 젖혀졌다. 그는 간혹 자신이 프레더릭과 같은 종이란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했다. 이제 와서는 무소용한 이야기였다.
메멘토란 최후의 영약이다. 불사자 마저 죽이는데, 일반적인 ‘산 사람’은 이 독에 반응하지 않는다. 메멘토는 일종의 시험약이었고 반응은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재이는 파벨이 죽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파벨이 울었다. 전부 아는 당신이 나를 살해하는 것이야말로 잔인한 짓이라고 했다. 재이는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뭘 바랐어?’ 사랑? 덧붙인 얘기에 파벨의 뺨과 턱으로 눈물이 고드름 줄기처럼 흘러내렸다. 저 한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랑하기 전에 죽여야겠다고 재이는 생각했다. 파벨이, 가니메데의 그 파벨이 사랑에 녹슬어 둔해지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봐온 터다. 곁에 붙들어 두고 싶은 밤마다 시뻘건 경종이 울렸다. 이대로는 안 돼. ‘우리는 파멸할 거야.’ 재이는 재난에 맞서는 법을 몰랐다. 그 자신이 폭풍의 눈이었으니까.
프레더릭을 살해하고 나서 그는 파벨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사내는 태양처럼 멀쩡히 살아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했고, 재이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원망하며 피를 쏟았고 재이를 사랑했다……. 새빨간 거짓말 같은 꿈이었다.
일어나면 곁에 파벨 프레더릭이 있었다.
재이는 손가락을 움직여 차갑게 말라가는 죽은 살갗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빛에 서린 것은 허공에 잠깐 빛났다 사라지는 비행기의 흔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세상에 어떤 가치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사라지지만, 미련 때문에 얼마간 꿈지럭거리며 남아 있는 그 자국 말이다.
“네가 내 메멘토모리군.”
잊지 못할 죽음으로 사내는 이 영혼의, 영혼이란 게 있다면 말이지만, 곁에 있어 줄 거였다. 재이는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라디에이터를 꺼둔 지 하루 째라 침실은 영안실처럼 써늘했고 옷은 다 구겨져 있었다.
지금이 한낮이라는 걸 안다. 봄이 오는 어느 겨울날. 입김과 때늦은 한파 속으로 걸어야 했다.
그는 언제나 겁쟁이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