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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날씨였다고 기억한다. 불이 붙기 좋겠네요, 말했더니 김소하가 산에서 그런 이야기 하는 것 아니라며 꾸중을 놨다. 푸르스름한 낙엽송 이파리 떨어진 것에 불을 붙이며 연기 피우고 놀려던 설화계 아이들이 대신 시무룩해졌다. 귀신같이 눈치를 챈 김소하가 정기를 다 죽일 셈이냐고 버럭거리려던 차였다. 나뭇가지가 우둑,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듯했다.
고목이 부러지는 일도 안타깝기야 하지만, 거기에 아이들이 깔리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이었다. 소하는 얼른 팔을 뻗어 아이를 자리에서 거두려고 했다. 따라서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멀거니 서 있던 아라온이었다. “소하 씨!” 손으로 상대를 붙잡으려는, 이 연쇄작용은 다시금 기이한 파열음이 들려오는 것과 함께 멈추었다.
푸른 선이 시야를 가로질렀다. 김소하는 그것이 번개라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아라온은 그게 뭔지 알았다.
“게임 깨졌잖아!”
코코는 재빨리 공지 사항을 확인했지만 서버 점검은 두 시간 후였다. 그러니까, 기기나 프로그램 혼선의 일종이었는데 일러스트를 크게 보겠다고 컴퓨터로 플레이한 게 문제 같았다. 기본적으로 블**택 같은 건 렉이 걸리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김소하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라온으로 돌아간 그는 무심결에 소하를 불렀다.
당연히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게임이 멈추어 버렸지 않은가.
오산이었다. 김소하는 뒤에서 부르니 ‘당연히’ 대답했다. “예.”
코코는 놀라서 노트북을 덮어버릴 뻔했다. 그러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할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덮다가 화면 깨 먹으면 수리비가 더 나올 것이라는 현실적인 계산 하였다. 덕분에 멈추어 있던 아라온의 손을 김소하가 잡아 흔들었다.
“저기요?”
“……네!”
“정신 차려요.”
“네!”
김소하는 금세 자격자를 포기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퍼런 점과 선이 파도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창호지에 격자 진 창문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사각형을 만든 그것들은 언뜻 납작해 보였지만 출렁할 때마다 산 것의 위장처럼 속을 내보였다. 공백. 공백의 색을 무어라 해야 할까? 김소하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분석하려고 하다가, 뒤에서 뻗어온 두 손에 눈이 가려졌다.
그래보아야 키 차이가 나서 어설프다. 소하는 뭐 하냐는 듯이 눈을 한 번 깜빡거렸다. 손안에서 움직이는 눈꺼풀의 촉감에, 깜짝 놀란 아라온이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완강하게 팔목을 붙잡아 이쪽으로 돌렸다.
“보, 보지 마요 저거.”
몸을 돌려보아야 사위가 이러한 공백으로 메워져 있어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은 건 조금 후였다. 김소하는 한심하다는 듯이 아라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격자는, 드물게 공포와 긴장으로 질린 얼굴이었다. 창백한 데다가. 손에 땀이 나던가. 김소하는 눈가에 와닿았던 축축하고 차가운 살갗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이, 이거 어쩌지. 껐다 켜면 되나.”
“무슨 소리예요? 좀 걷다 보면…….”
다시 한번 눈을 깜빡인 김소하가 그대로 굳었다. 아라온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고, 코코는…… 코코는 이번에야말로 노트북을 쾅 덮어버릴 뻔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자, 더위가 느껴졌다. 습한 열기에 놀란 아라온이 눈을 뜨면 김소하가 그를 받치듯이 안은 채 바닥에 꿇어앉고 있다. 게임에 심한 오류가 나기 전까지는 분명 선선하고, 건조한 가을날이었는데. 둘러보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여긴 거대한 녹음 속이었다.
열대의 볕이 나뭇잎을 타고 미끄러져 정수리를 쪼았다. 아라온은 저도 모르게 찡그리며 눈가를 가렸다. 그새 김소하가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게 보였다. 빛과 볕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라온은(이 공간에서 이 이름을 쓰는 게 맞기나 한 걸까?) 일단 소하의 귓가에서 관자놀이로 손을 미끄러뜨려,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새하얘 보였다.
“나, 나만 믿어요.”
아라온이 말했으나 영 안 미더운 선언이었다. 더듬기까지 해서, 아라온은 그새 빨개진 얼굴로 얼른 일어섰다. 그리고 멈추어 섰다.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다. 꽤 유명한 게임 원화 배경이 이렇지 않았나? 온통 쓰리디로 구현돼버렸긴 했는데, 다 비슷비슷한 나무와 넝쿨의 줄기 방향 같은 게 찝찝했다. 그 게임은 망한 지구에서 폐허를 질주하는 레이싱 게임이었고 이건 가장 유명한 메인 맵과 흡사하게 생겨먹었다. 만일 거기에 떨어졌다면, 어, 기기 오류를 넘어선 심각한 상황이 분명했다. 혹시 이대로 소하 씨를 현실로 빼낼 수도 있는 걸까…….
그때 벼락같은 생각이 코코의 뇌를 갈기고 지나갔다. 김소하를 원래 위치에 돌려놓을 수 없으면 어쩌지.
설화계고 뭐고 집어치운다 쳐도(김소하 눈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꽤 뻔뻔스러워야 하는 일이었으나) 게임 스토리 자체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코코는 안 그래도 레일로드 방식인 이 게임에서 주요한 조연이 빠지게 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아무리 훼방꾼 역이래도(뻔뻔해야 했다) 결국 서사를 위한 캐릭터인 것이다.
코코가 말했다. “뛰어요!”
조작법이 어떻게 됐는지, 뛰자고 생각하니 김소하를 붙들어 매고 달리게 되었다. 게임 속에서 한 번도 뛰어 본 적이 없는 김소하는 당황하는 듯했으나 곧 따라왔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망한 세상 한복판에 정글과 함께 내던져져 있으면 줏대가 사라지지. 점검 시작까지는 두 시간. 그 전에 김소하를 <신도 야근을 하나요?> 속으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엄청난 일조량에, 그저 누렇게 뜬 마냥 보이는 하늘이 점점 멀어졌다. 김소하와 코코는 함께 가느다란 선 위를 달리고 있었다. 밟을 때마다 잔물결처럼 퉁, 하고 널찍해지는 이것이 두 사람의 발자국으로 연속적인 물방울을 그려냈다. 시야가 확 밝아졌다고 느껴졌을 땐 모 일본 게임의 라벤더 안식처였다. “장난해?!” 코코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자 김소하가 가만히 말렸다.
그가 말했다.
“뛴 보람은 있네요. 평화롭지 않습니까.”
코코는, 이 게임의 배경과 스토리에 관해서는 무어라 말해주려다가 그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김소하가 눈썹을 찡그렸다.
“뭐가 문젠데요?”
“……그러는 소하 씨는 왜 이렇게 태평해요?”
“잘못 든 길은 돌아가면 되니까요.”
돌아갔다간 디*블로에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코코는 외치고 싶었다. 아니면 다*소울이나. 여기 어디 내 집이 있을 텐데, 하던 코코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아라온이지 참.
기실 이쯤 되어선 이름이며 자격 같은 게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블**택을 넘어서서 온라인 게임까지 진입했는데. 그래서 코코는 깨끔한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김소하가 옆에 쭈그려 앉아 코코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코코는 즉시 도끼눈을 하며 그의 두루마기 소매를 잡아채었는데, 김소하가 미묘하게 웃고 있는 걸 깨닫고는 버럭해버렸다.
“뭐가 웃겨요?!”
“글쎄요…….”
소하는 표정을 흐렸다. 재밌다고 해야 할지, 그의 상식으로도 말도 안 되는 순간이동이긴 한데, 게다가 신체 말단의 감각도 기이하게 달라지는 것 같긴 하고, 절대 웃길 상황은 아니었지만 자격자의 심통 난 얼굴을 보니 그냥 웃음이 나온 것이다. 비끄러진 미소에 가까워졌던 입매가 다시금 차분해졌다.
대신 그는 코코 곁에 같이 주저앉아, 마찬가지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뭡니까.”
“난들 알겠냐구요.”
“신이 개입한 사건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혹시 또, 선하가.”
“아뇨. 절대 아닐걸요.”
“……확신하시네요.”
눈이 마주쳤다. 코코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 일의 전말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코코뿐이겠지만, 스스로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와 당신이 사실은 차원조차 다른 세상을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굳이 말해 보아야 헛소리 취급당하거나, 아니면.
아니면……. 경멸할까, 화를 낼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무시해버릴까? 어느 쪽이든 좋은 결과는 아닐 터라고 코코는 생각했다. 소하는 그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코코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뭐 하는 거예요.”
코코가 투덜거리자 김소하가 빙긋이 웃었다. 코코는 자기 눈이 삔 줄 알았다.
“……나, 나는 소하 씨 돌려보내려고 힘쓰는 중인데.”
“이렇게 주저앉아서?”
“……같이 앉아 있으면서.”
“뭐, 이럴 땐 기다리는 게 상책이니까요.”
“뭘 기다리는데요?”
“기회를.”
김소하의 눈이 일순 빛났다. 푸른 스파크를 포착한 그가 번개처럼 손을 뻗어 그것을 쥐었다. 살갗이 갈라졌다.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그의 손이 반쯤 갈려 나가는 듯했다. 코코가 짧게 비명을 지르는 사이, 소하는 자격자를 공허한 틈새에 밀어 넣고 자신도 몸을 던졌다.
메마른 날씨였다고 기억한다. 김소하의 손은 벡터값이 깨져 채색과 선이 분리되어 있었다. 더는 가을날의 산불이 문제가 아니게 된 코코는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하는 한쪽 눈썹을 약간 올렸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코코는 다시 한번 울화가 치밀어 소리쳤다.
“몸 좀 챙겨요!”
“여기서 더 어떻게요?”
“……그건!”
완전히 메타 사건이라 할 말이 없긴 하지. 김소하는 아마 하루 두 끼에 영양제까지 잘 챙겨 먹을 것이다. 솔직히, 코코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공식에 분량 늘려 달라고 문의 넣어봤자 이런 훼방꾼 캐릭터는 다치고 언성 높이고 잘못하면 죽는 식이 될 거다. 미연시 비공략 조연이란……. 캐릭터의 죽음에 바칠 국화 한 송이조차 허락되지 않는 처지를 깨닫고, 코코는 모골이 송연해졌지만 이 레이어 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코코의 목소리에 대한 반향처럼 여기저기서 메아리가 들려왔다. “산울림 같네요.” 김소하는 태평한 얘기나 지껄이고 있었다. 김소하가 차분하고, 아라온이 짜증을 내는 상황에 익숙지 않아 코코는 잠깐 멈칫했지만 그 렉걸린 손바닥을 주물거리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코코는 숨을 들이켜 울먹거리는 일을 막았다. 코맹맹이 소리로 돌아가요, 말하자 소하가 웃었다.
왜 웃냐 물으니 그냥 재밌어서란다. 기가 차서 코코는 그의 정강이를 한 대 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점검까지 한 시간 남았다.
“당신을 돌려보낼 거예요. 반드시.”
“제가 할 소리를.”
당신을 돌려보낼 거라고, 김소하가 말했다. 천산에 불이 나면 큰일이니 이참에 기강을 잡아놔야겠다고. 그런 말을 해서 코코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산불 조심 포스터라도 그리라고요?”
“불놀이 대신 할 일 생기고 좋네요.”
“크레파스값은 당신 앞으로 걸어 놓을 거예요.”
“어디 해보십쇼.”
목소리를 크게 내면 메아리가 극심해졌기 때문에, 둘의 음량은 점차 작아졌다. 그러다가 침묵이 감돌자 김소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껏 민감해진 코코가 별 이상이라도 있느냐 지적하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퍽이나 가을 하늘 같아서요.”
소하가 작고 푸른 점으로 이루어진, 파동의 격자를 가리켰다. 코코는 비로소 그것을 보았다. 계곡물에 뜬 곤충 그림자처럼, 가느다란 빛 선이 고요히 반응했다. 살아 있는 것의 지저에서 투명한 빛이 날개를 펴듯 심장을 가진 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코코가 잠잠히 있자 김소하가 말했다. “아름답네요.”
그 김소하 입에서 나온 말치고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