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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안셔스 송
지직거리며 채널 돌아가는 소리에 엘리멜렉은 눈을 떴다. 이곳은 노란 방이었다. 엘리멜렉은 모자와 지팡이, 코트를 내려놓고 손에는 하이힐 한 짝을 건 채 자고 있었다. 이 황금 방에는 선조의 저주가 걸려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므로 손님들이 꺼리는 것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멜렉은 단지 사람 냄새 더 맡기 싫다는 이유로, 셰리주를 몇 모금 마시고 눈을 붙인 참이었다.
그런데 술이 상했는지 이렇게나 잠이 든 것이다. 그는 금사로 덩굴무늬를 짜 넣은 소파를 툭툭 더듬었다. 현실감을 되찾으려는 노력이었다. 간신히 차림새를 추스르고, 안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려는데, 그제야 이 소리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 방에는 원래 축음기니 라디오 같은 게 없다. 유령의 장소에 그런 생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으니까.
다만 이 여자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엘리멜렉은, 살롱의 주인, 그러나 파티광이라는 말이 걸맞은 귀부인의 저택이므로 낯선 사람의 존재에는 시큰둥했다. 어디서 주워 온 ‘재미있는’ 손님이겠지 한 것이다. 실제로 신문 배달부 같은 차림을 한 장신의 여성은 부인들의 흥미를 끌곤 했으니.
그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정장을 탁탁 털고, 상대방의 수수한 옷차림을 훑으며 말했다.
“누구신지?”
“춤추는 탐정 달카 페트란!”
싸구려 소설에 나올 것 같은 자기소개였다. 다만 엘리멜렉은 탐정이라는 얘기에 흥미를 느꼈다. 그가 온전한 꼬라지로 스툴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는데, 두 손을 위로 올려 앙 오(En Haut) 자세를 만들던 달카가 피식 웃었다. 엘리멜렉이 눈썹을 슥 올리며 의아해하자 달카는 춤을 청했다. 정석적으로,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어서… 신사가 마담에게 그러듯이.
엘리멜렉은 팔짱 끼며 방어적으로 굴었다. 그가 상대를 쏘아보며 말했다. “처음 보는 자기의 손을 잡을 순 없지.” 일종의 역할 놀이였고 우스꽝스러운 소문이 도는 이 노란 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놀랍게도 달카 페트란은 이해한 듯했다. 고개를 살짝 기웃하며 이렇게 대꾸한 것이다. “처음 본 게 아니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엘리멜렉은 생각했다. 탐정과 변호사라니 우스울 정도로 밀접한 조합이 아닌가. 게다가 서로에게 일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개미와 진딧물 같은… 좋은 뜻이다. 물론 개미는 진딧물을 잡아먹을 테고 그게 어느 쪽인지에 관해서는 언제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라디오에서 20년대풍 재즈가 흘러나왔다. 춤곡보다는 드라이브가 당기는 음악이다.
“운전할 줄 아는가?”
달카가 물었다. 엘리멜렉은 종잡을 수 없는 스텝에 조금 당황하다가, 대답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짙은 분칠로 가린 표정에 홍조가 돌았다.
셰리주의 취기가 가시지 않을 걸 수도 있고.
어쩌면 이게 다 꿈일 수도 있다. 유령을 만나게 된다는 노란 방이니까……. 신을 믿느냐고? 오, 무념하다면? 대답이 될까? “아니지, 내가 물은 건 ‘운전할 줄 아느냐’는 거거든.” 엘리멜렉은 고개를 젓다가 끄덕거렸다. 달카가 리듬을 따라 정체 모를 스텝을 밟으며 방 전면에 걸린 정물화 앞으로 다가갔다, 기보다는 빙글빙글 돌아갔다. 엘리멜렉은 테이블 모서리에서 추락하려는 술잔을 붙잡을 때처럼 그 어깨를 턱 붙들어 주었다.
달카는 금장 프레임에 집어넣은 정물 속, 사과 한 알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을 핥는 대신 북북 문질러 닦았다. 엘리멜렉이 코웃음 쳤다.
“옛 그림이라면 비소를 썼을 텐데.”
“설마. 역겨운 굴과 노른자 맛만 난다네.”
화폭 안에는 해골이 있었다. 나름의 메멘토 모리인지, 아니면 그저 노란 방에 걸맞은 그림을 걸어둔 건지 알 수 없었다. 달카는 이 액자를 보러 왔다고 했다. “부인이 하도 자랑해대지 뭔가. 오직 이 그림 한 점이 그녀가 받은 유산 전부인데도 말이야.” 음악이 점점 흥겨워졌지만, 이제는 둘 다 춤을 추지 않았다. 달카가 벽난로 위에 놓인 소형(이라고 해도 꽤나 크다) 라디오를 들고 왔다.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려놓자 카페트 때문에 사운드가 좀 먹먹해지는 듯했다. 발소리처럼.
엘리멜렉은 해골의 왼쪽 눈 밑에 쓰인 조그만 글씨를 보고 싶었다. 좋은 루페를 가져온다면 감정할 수 있을 텐데, 달카 페트란의 말대로 비소를 쓸 만큼 오래된 유화는 아닌 듯했다. 게다가 진짜로 썩은 노른자 냄새가 풍기는 것도 같았다. 왜 탐정은 언제나 예술과 엮이는 걸까? 그것도 무척 불길한 방식으로. 변호사라면, 글쎄 베레신스키의 경우에는 그림에 매겨진 숫자와 얽힌다 해야겠지.
그가 말했다.
“부인은 유령을 믿고, 아직도 사술 따위를 진짜라고 생각해.”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다 비슷하지 않은가?”
“그을쎄. 자기는 어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지만 점은 치지 않는 탐정.”
달카가 그림 속 화병에 꽂힌 장미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을 유려하게 움직여서(짧게 깎은, 때가 낀 손톱이 눈에 띄었다) 빼어난 장미 한 송이를 입에 무는 시늉이었다. 화폭이 정말로, ‘방 전면’을 가릴 만큼 거대했기 때문에 우아해 보이지는 않았다. 저 장미를 진짜로 끄집어낸다면 달카는 연분홍빛 꽃송이에 머리가 파묻혔을 것이다. 꽃가루도 좀 묻히고.
그때껏 그들은 손을 잡고 있었다. 어째선지 그랬다. 달카의 막춤에는 그러한 동작도 있겠거니 봐주고 있던 엘리멜렉은 미국 신사답게 눈총 주었다. 달카 페트란이 입에 꽃대를 문 채 미소 지었다.
그들은 합의 끝에, 잡은 손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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