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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해는 시고 짜고, 적당히 달콤한 배신으로
어딜 가던 무지갯빛이었다. 셔벗, 번호판, 수영복, 프라이드 플래그, 그리고 제이크가 입은 옷까지… 카터는 제이크가 골라온 옷을 보고 경악했다. 등 뒤에 쁘띠한 무지개 와펜이 붙은 “I Love Hawaii” 티셔츠였다. 시밀러 룩을 연출하기 위해 ‘파란색, 반소매’라는 구체적인 요청사항을 단서로 붙여놨던 카터는 절망했다. 관광지 잡화점에 들여보낸 것부터가 문제였다. 하지만 그 많은 티 중에 이렇게까지 화사한 게이 커플 같은 옷을 고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카터가 손에 쥔 애플민트 셔벗이 녹아서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고 왔던 거무죽죽한 후드티를 들고 있던 제이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지적했다.
“하나도 안 먹었네. 맛없어?”
다른 거 사줄까, 라는 요지인 것 같았지만 카터는 옷이나 반납하고 오라고 하고 싶었다. 여행지까지 와서 싸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목 끝까지 치민 이야기를 막아섰다. 안 그래도 비행기 안에서 냉전을 벌였던 터다. 22시간의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카터는, 뻔뻔한 얼굴로 지껄였다.
“예쁘다.”
“……그거 맛없냐고?”
“응, 맛있어.”
그는 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처넣고 제이크의 양 어깨를 턱 붙들었다. 그리고 비장하게 말했다.
“너는 뭘 입어도 예뻐.”
“…….”
제이크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예쁘다는 말은 진심인 것 같고, 또 복장을 무시하려고 땀 벌벌 흘리는 노력에 보답하기 위해, 제이크는 이번만은 그냥 넘기기로 했다. 하와이에서 어글리 스웨터를 입든 장례식 셔츠를 입든 그는 알 바 아녔다.
비 내리는 날의 차량 이동, 경유지 두 곳, 23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하와이는 천국 같았다. 일단 어두침침하고 와이파이 안 터지는 비행기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둘은 멀미가 그치는 기분을 느꼈다. (제이크는 비행기 멀미를 했다.)
공항에서 샌드위치를 한 개씩 사 먹고 기운 차리긴 했지만, 비행 내내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컨디션은 저조했다. 특히 제이크가 그래 보였다. 파리한 낯빛에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표정이 안쓰러워 보이기만 했다. 숙소에 짐을 부려놓자마자 뛰쳐나온 카터는 이제야 그걸 눈치챈 참이다.
그는 제이크의 손을 잡았다. 본의 아니게 애인의 입맞춤을 피한 게 됐지만, 막 뽀뽀하려다가 막힌 엉거주춤한 자세 같은 것이 귀여워서 카터는 별 신경 안 썼다. 그가 말했다.
“이러니까 진짜 관광객 같네. 식사부터 하자.”
관광객 맞잖아, 따위의 군소리가 돌아왔다. 카터는 그냥 귀엽다는 듯 웃어주고는 그새 빌려온 차 문을 열었다. 깍듯한 기사인 체 윙크하며 제이크부터 태우자 또다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난 공주가 아니거든.” 카터는 맞는데, 진짠데, 같은 흰소리로 대꾸하고는 운전석에 탔다. 독일서부터 봐두었던 유명 다이너에 갈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제이크는 다이너에서 더 시들시들해졌다. 음식이 맛없거나, 직원의 매너가 불편할 정도로 별로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독일식 다이너에 비하면 극진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관광지니까.) 다만 제이크의 컨디션이 불쌍할 정도로 악화되었을 뿐이다. 멀미가 가라앉자마자 코카콜라를 마신 대가인 듯했다.
게다가 카터가 고른 다이너는 햄버거가 주메뉴였다. 덜 익은 토마토를 튀겨서 향신료를 묻힌 요리와 프라이드 치킨, 햄버거를 앞에 두고 그는 고민스러워했다. 이 음식을 함께 먹는 게 바라던 바이긴 했는데, 제이크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질 것만 같았다.
정작 제이크 본인은 해쓱한 얼굴로도 별생각 없어 보였다. 염려 섞인 시선을 눈치챘는지, 제이크가 피식 웃었다.
“난 원래 잘 주워 먹고 다녀.”
반쯤 농담이었지만 카터는 그게 자조로 들려서 걱정만 배가 됐다. 카터가 기름 잔뜩 밴 듯한 감자튀김을 본인 쪽으로 당겨오는 걸 보고, 제이크가 웃었다. “있지, 나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 나름 화해의 신호였다. 그러나 카터는 이미 다 풀린 표정이었다. 그렇다기보다는, 다툼이나 냉전 따위 다 잊어버렸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제이크는 조금 심각해졌다. 이 여행을 무척 고대해온 건 그가 아니라 애인이었으므로.
그때 종업원이, 햄버거 세트를 들고 왔다. 시장에서 쓸 법한 평범한 쇠 쟁반에 무겁고 예쁜 도자기 접시를 내렸다. 둘은 버릇처럼 잠시 대화를 멈췄다. 배타적으로 구는 건 제이크에게는 생존 기술이었고, 카터에게는 제이크와 있을 때 발동되는, ‘리치’ 소동 때부터의 습관이었다. 자각한다면 웃을 터였지만 정색하는 표정을 보자면 무언가 중요한 이야길 방해한 것처럼 생각되어 종업원은 팁도 안 받고 돌아섰다.
“일단 먹자.”
제이크가 말했다. 욕지기를 삼키고 태연한 목소리를 내느라 고생했는데, 어떻게든 먹힌 듯했다. 카터가 얼마간 눈치 보다가 곧장 햄버거를 집어 든 것이다. 너무 세게 쥐었는지, 비닐 꽃이 달린 이쑤시개로 고정된 층층이 무너졌다. 카터는 아픈 애인을 잠깐 잊고 감탄했다.
“빵이 엄청 부드러워.”
“그래?”
제이크도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아직 기름기가 지글지글 끓고 있는 들고 바로 베어 물었다. 패티에서 육즙이 주르륵 흘렀다. 몇 방울 떨어진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숙여 닦아냈는데, 입안으로 터져 나온 즙이 많을 뿐 턱으로 흘러내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확실히 카터가 고른 곳 다웠다. 카터가 데려갔던 식당 중에서는 실패한 데가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관광지 한복판이라는 이유로 얕본 면이 없잖아 있었는데, 제대로 구웠는지 속이 연분홍빛인 촉촉한, 간 돼지고기에 덜 숙성된 딱딱한 토마토가 잘 어울렸다. 고기와 산미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얇게 저며 넣은 파인애플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몇 번 씹고 있자면 치커리의 톡 쏘는 맛도 올라와서, 겉보기와 다르게 전혀 느글거리지 않았다.
입에 치커리 꼭지를 물고 오물거리는 걸 본 카터가 풋 웃었다. 제이크가 뭐냐는 듯 무심하게 시선을 들었다. 카터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쨌든 애처럼 들뜬 게 더 보기 좋았으므로 제이크는 그쪽으로 치커리 꼬다리를 툭 뱉어주었다. 어린 애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토끼야?”
“…언젠 고양이라매.”
제이크가 짐짓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내용이 내용인지라 우스워 보였을 뿐이다. 카터는 대답 대신 햄버거를 와앙 베어 물었다. 빵이 워낙 부드러워서, 씹는다는 느낌 없이 입 안에서 녹았다. 제이크가 피로해하고 있으니 부드러운 음식인 게 천만다행이었지만, 독일식 딱딱한 빵과 반쯤 타버린 패티에 익숙한 둘은 희고 연약한 버거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 증거로 게눈감추듯 먹어 치우고 엄지에 묻은 소스까지 빠는 카터가 보였다. 시큼한 칠리소스였다.
제이크도, 막상 음식이 들어가니 허기졌는지, 막 나온 요거트 음료에 감자튀김을 찍어 먹었다. 고추냉이 분말을 살짝 묻혀서 굵은 소금에 굴린 케이준 감자였다. 코끝을 벌처럼 쏘는 매운맛이 특징인데, 오래 가지 않는 데다가 짭짤한 맛이어서 자꾸 손이 갔다. 특히 달콤한 요거트에 찍어 먹으니 술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무렵이 되자 손님이 몰려들었다. 둘은 대화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러서, 일찍이 가게를 나왔다. 제이크는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시원한 거나 사 먹자.” 시무룩해지려던 카터의 표정이 활짝 폈다. 계획한 일정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모를 리가 없지, 카터는 여행 일주일 전부터 ‘쉐이브 아이스’ 이야기만 했다. ‘그거 알아? 쉐이브 아이스는 오바마 샤베트라고도 한대. 오바마 대통령이 단골이었다나 봐.’ 이런 식이었다. 사실 제이크는 시원한 걸 먹을 기분은 아니고, 얼른 호텔에 들어가서 엎어지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로맨틱하지 못한 상황에 난처해하는 애인의 얼굴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설상가상 ‘와이올라 쉐이브 아이스’ 앞에는 현지인과 관광객이 섞인 긴 줄이 서 있었다. 제이크는 디저트 따위를 언제까지고 기다려 받아먹는 취미가 없었으므로 차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핸디 선풍기를 든 카터가 땀을 뻘뻘 흘리며 기다려 받아온 것은 조그만 컵에 소복이 든 무지개색 아이스와 팥빙수 하나였다.
대통령이 먹었다는 것치고는 상당히 소박한 메뉴였다. 카터는 신이 난 표정으로 레인보우 셔벗을 퍼먹었다. 제이크는 그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입에 들어가면 똑같이 물이 된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그래도 카터는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가 말했다.
“엄청 달아.”
“시럽 좀 봐. 달달할 만도 하지.”
“그리고 시원해.”
“얼음이니까.”
“왜 그렇게 냉정해?!”
무심코 해커같이 굴어버린 모양이었다……. 제이크는 딴청 부리며 제 몫의 팥빙수를 입에 넣었다. 차갑게 굳어 질깃질깃한, 밀떡인지 쌀떡인지 싶은 젤리와, 설탕을 때려 넣은 통팥의 맛이 강하게 났다. 제이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빙수를 이미 제 몫 다 비워가는 카터에게 양도했다. 카터는 다 섞여서 적갈색이 되어버린 얼음국을 훌떡 마시고 빙수를 받았다. 에어컨을 틀어놔서 녹지도 않고, 진짜 고양이가 핥다가 만 것처럼 새것 상태였다.
제이크는 깨끗한 스푼을 물고 카시트를 뒤로 젖혔다. 카터가 팥빙수를 해치우며 물었다.
“왜, 별로야? 아니 맛있는데?”
“팥도 젤리도 안 좋아해.”
“이건 떡이잖아. 바보. 떡 싫어하는구나.”
“싫진 않고, 그냥, 바게트가 더 좋다는 거지.”
제이크가 손을 살래살래 저었다. 카터는 얼음이 빵가루라도 된다는 듯이 잘 먹었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제이크가 물었다.
“이제 집에 가자.”
“뭐? 숙박권 하루 남았어.”
“그 집 말고….”
“그럼 어디?”
“레미네 집.”
그들은 노란 차에 타고 있었다. 택시를 다시 한번 개조해서 렌터카로 만든 것 같은 모양새의. 즉 비루했고, 카터에게는 천장 높이도 맞지 않았다. 몸을 수그린 채 디저트를 왁왁 조져 놓던 카터가 일순 시트를 뒤로 쑥 밀었다. 위치가 맞아떨어져서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말했다.
“신경 쓰고 있었구나.”
“응…….”
제이크의 목소리에 졸음이 묻어났다. 카터는 흠, 하더니 별말 없이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달구어진 엔진이 털털거리며 차체를 앞으로 움직였다. 무어라 잔소리나 군소리가 돌아올 줄 알았던 제이크는 눈만 끔뻑거렸다.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하면 카터의 뒤통수가 보이는 자세였다. 제이크가 잠결에 중얼거렸다.
“네가 걱정돼.”
갑자기 브레이크가 밟히는 바람에, 몸이 털썩 쏠렸다. 제이크는 물론 안전벨트 덕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어안이 벙벙해져 잠이 좀 깼다. 멀미가 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차가운 걸 좀 더 먹었어야 했던 모양이다. 카터는 운전대를 붙든 채 창밖만 쏘아보고 있었다. 일어설 기운이 없어서, 제이크는 그냥, 누운 채로 물었다. “카터? 뭐 있어?”
카터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고양이가 있어서. 도로가 쓰레기네.”
아니다. 고양이는 물론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 해변이 보이는 멋진 국도가 눈앞에 쫙 펼쳐져 있었다. 곧 해가 질 터라 아름다운 풍경이 연출될 것이다. 애초에 이른 오후의 계획은 그걸 노리고 짠 거였다. 제이크에게 이국의 노을을, 오렌지빛 바다를 보여주려고. 그래서 잊어버렸던 것이다……
제이크는 적색약 같은 세상을 살고 있어서… 그의 시야에는 바다가 아니라, 녹색 눈동자만 비쳤다. 무엇을 먹고 어떤 낭만을 즐길지가 아니라 당초의 목표—가족을 만나러 간다는 데이트 핑계—가 더 중요했다, 그에겐. 평소라면 토라졌을 테지만 제이크가 골골 앓으면서도 보여주었던 다정한 태도 때문에, 카터는 도리어 울고 싶어졌다.
입술을 꽉 깨물고 운전하던 그가 겨우 중얼거렸다.
“제이크.”
“응?”
“일어나 봐, 그리고 바깥 좀 봐.”
어차피 다시 누울 거라서, 시트를 높이는 대신 제이크는 벨트를 풀었다. 그때까지도 카터는 앞만 보고 운전했다. 운전기사로서는 좋은 습관이었지만 제이크는 좀 어리둥절했다. 잠깐 뽀뽀라도 해줄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해안을 보고 나서 생각을 달리 먹었다. 카터도 저길 좀 봐주었으면 했다. “세우자.” 제이크가 말했는데, 카터는 들어주지 않았다. “카터….” 묵어야 할 호텔은 도로변에 있었는데 점차 가까워지다가 결국 지나쳐버렸다. 근교에 심긴 야자수가 휙휙 지나갔다. 해안선은 정확히 오렌지빛이었고 바다는 짙은 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번뜩이는 구리선 같아.’
제이크는 카터의 이마께를 보고 있었다. 거기에 맺힌, 무어라 형용 못 할 찬란한 빛을.
천천히 차를 세우고 나서, 카터는 엉엉 울었다.
키스는 쓰고 짜고 신 맛이 났다. 그들은 웅얼거리며 내일, 도시에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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