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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자가 무너진 말의 앞뒤
휴 셰퍼드는 엘리멜렉을 뒤집힌 마차 앞에서 처음 목격했다.
처음에 그는, 시가를 문 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궁금해했고 이내 신경 끄고 싶어졌다. 타인에 관한 의문은 그를 쉽게 피로해지도록 만들었다. 다만 이 축축한 날씨에 성냥불을 피울 수 있다니 괜찮은 능력이라고는 생각했다. 샘은 그때 ‘휴’였기 때문에 부러 다른 사람에게 연소적으로 보일 필요가 없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고, 말이 있었다. 행인들이 불안해한다는 이유로 목숨이 끊어진 마부의 소유물을 쏴 죽이기 전, 다리가 부러진 말을 진정시키고 자리에 눕혀야 했던 것이다.
그는 뒤집어진 채 바둥대는 동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죽이 두껍고 발목에 깃털을 두른 걸로 보아 샤이어에 준하는 중종마였는데, 다른 품종과 씨가 섞였는지 불분명한 몸집을 하고 있었다. 휴는 곧장 말의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 입은 부상도 아니고 꽤 된 것 같았다. 그는 주인의 몰상식함에 혀를 찼다.
아무래도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지.
엘리멜렉이 이쪽을 보았다. 드물게도 휴가 먼저 말했다. “물러서. 뒷발에 채일 건데.” 말한 쪽이 먼저 낭패라는 표정을 짓자, 엘리멜렉은 흥미를 보였다. 이 음침한 청년이 자의로 다가와 ‘가여운’ 종마를 챙기는 걸 유심히 본 참이었다.
휴는 그냥… 후회했다. 멀리서는 몰랐는데, 키가 컸고, 화려한 정장에, 유대인인 데다가,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그는 우연 아닌 스스로 이따위 인간에게 다가와서 귀찮게 굴고 있는 거였다. 얼른 빠져나가야지 싶었다. 문득 생각난 건데 이 인간, 신문에서 보았다.
뉴스가 다 그렇듯 별로 좋은 이야긴 아니었겠지. 손바닥만 한 타블로이드 지면 속 길고 긴 해초 머리와 중절모가 기억났다. 인상은 흐릿하게 남아 대조해보기도 성가셨다. 대체로 휴는 사람의 얼굴을 잘 들여다보지 않았다. 인간의 풍모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소화하기에 버겁고, 겨우 이해해보았자, 동물보다 저열했기 때문에.
엘리멜렉이 대답하기 직전 휴는 벌써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형이 물어본 게 있다.
‘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워? 난 아직 겁이 나. 척추가 부러질까봐 말이지.’
‘겁이 많고 덩치 큰 괴물이라고 생각해. 사실 인간도 그렇잖아.’
호탕하고 멋진 웃음소리. 집안을 꽉 채운 담배 연기.
시가는 값진 물건인 것 같았다. 신문지에 싼 궐련보다 훨씬 좋은 향기가 났다. 유식한 사람이라면 럼이나, 잘 묵힌 목재에 비유할 만큼. 휴는 그렇지 않았고 연기에 기침이 날 것 같았다.
“물러서? 누가 누구한테 반말이야? 어머, 옷 좀 봐. 진흙투성이네!”
휴가 입은 장제용 앞치마는 깨끗했다. 다만 오래된 물건이어서 얼룩이 지워지지 않을 뿐이다. 휴는 이러한 사정을 속속들이 설명하기 귀찮았고, 무엇보다 수전노로 보이는 이 치에게 비굴해 보일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새벽부터 마차 운행에 쓰이는 말 다섯 마리의 장제를 마치고 실컷 빗질한 후였으므로 피곤했다. 그는 생각했다. ‘벌써 이 시간인데 왜 해가 안 뜨지?’ 엘리멜렉이 말했다. “비가 내린다던데!”
그는 품에서 잘 벼린 나이프를 꺼내 열었다. 불붙은 시가 끝을 잘라내고, 종이로 잘 감싸 남은 부분을 칼과 함께 넣었다. 으레 신사들에게서 볼 수 있는 품위 있는 동작이었다. 이제야 사고를 발견한 행인들이 주변에 둘러서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침묵이 일었다. 휴는 조용히 빠져나가기에는 글러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말이 아주 온순해서…….”
‘왜 이런 걸 지껄이고 있는 거지?’
휴가 계속 말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없겠어.”
“누가 맡겼다고.”
엘리멜렉 베레신스키는 이 청년이 아주 웃긴 작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에게 대체로 인간은 우습게 여겨지긴 했다. 특히 말 안 듣는 어린놈들은. 특별히, 도회지로 진출해 유학의 꿈을 품은 젊은이라면.
그는 휴의 이름도 직업도 몰라보았고 어떤 이야기의 기미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당연하지, 엘리멜렉은 대체로 관객석에 앉아 심사하는 역할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기연을 펼치기만 하면 되었다. 변호를 의뢰하는 의뢰인들이 그러했고 경멸조로 투덜거리는 악의에 찬 선박 사내들이 그랬다.
마차 안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엘리멜렉은 그게 자신에게 오던 의뢰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직 수금 전이었다. 그는 한가롭게 담배나 더 태우고 싶었다. 날이 궂지만 않았다면 시가 한 대를 다 태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경찰이 늦는군, 아무도 안 오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예컨대 마부 없이 달리던 마차가 전복되며 닫힌 상가를 때려 부수고, 승객이 즉사했다는 뉴스거리 같은 것.
꼬장꼬장한 변호인은 기자를 싫어하게 마련이지만 엘리멜렉은 달랐다. 그에게는 의뢰인을 입맛에 맞게 구슬리고 조작하여 기자를 뽑아내는 기술이 있었다. 기자들이 원하는 것을 그도 원했다. 아니 엘리멜렉은 더 거대한 이야기에 구미가 당겼다. 사람들이 카페테리아에 앉아 침 튀기게 의논하고, 지식인의 환멸을 사는 것이 그의 목표라면 목표였는데, 꼭 그것만 바라지도 않았다. 대중은 척도일 뿐. 그는 자기 자신의 기준이 나날이 높아지는 걸 느꼈다. 예컨대 쾌락에 대한.
엘리멜렉은 쾌감 같은 건 전혀 모를 것 같은 수더분한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알짱거리며 가지 않고 있었다. 그는 휴 셰퍼드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안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거 아닌가.”
“이미 죽었어.”
“끌어내서 눕혀놓는 편이…….”
“현장을 훼손하면 괜히 찬밥신세 되는걸. 인간의 도리란 거, 지켰다가 좋은 꼴 별로 못 봐.”
휴는 이 말에 경멸을 느꼈지만 그건 다른 인간들보다, 엘리멜렉을, 이 괴이한 거구를 자신과 가까이 놓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엘리멜렉이 말했다.
“게다가 누가 나한테 맡겨놨어? 자기, 그런 걸 내게 부탁할 거야?”
“아니. 누가 그러겠어.”
휴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는 ‘더러운’ 앞치마를 벗어 구겨 쥐고는, 앞머리 틈새로 화려한 변호인을 잠시 노려보았다. 마치 당신 같은 것 때문에 지친다는 눈빛이었는데 눈동자 색이 어떤지 제대로 보일 정도도 아녔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비슷한 시선에 익숙했다. 당신네가 세태를 망친다는 영국계 미국인들의 눈빛 말이다.
‘당신들은 언제나 내게 맡겨놓지.’
그는 생각했다. 타인의 좋은 점은 바로 이거였다. 입맛대로 이야기를 꾸며낼 유일한 기회라는 것.
이름이라도 알게 되는 순간 재미 볼 수 없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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