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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무도(23.06.22)

나사르 본주 2024. 8. 19. 09:46

태연한 무도

 

 

 

 

 

 

블나이는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비공정 탑승장에 미리 와있던 델프림이 설핏 웃었다. 저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어서, 블나이는 약간 발끈했다. 그가 웅얼거리며 변명했다.

빗소리 때문에 못 잔 거다.”

결국 델프림은 웃음을 터뜨렸다. 블나이가 그 화사한 얼굴을 물끄러미 노려보는 가운데, 델프림이 손을 내밀었다. 높다란 탑승장 끄트머리에 서 있어서 그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수도 아보리스까지는 먼 길이 될 터였고 굳이 심술부릴 이유도 없다는 걸 알지만, 단순한 자존심 때문에 블나이는 에스코트를 거부했다. 델프림은 가끔, 블나이란 사람이 아직 소년 시절에 갇혀 있다는 듯 행동할 때가 있었다.

시간에 딱 맞추어 올라탔기 때문에, 델프림이 오르자마자 탑승장 문이 닫혔다. 블나이는 선미로 향했다. 떠나온 곳의 풍경은 아침부터 자욱한 물안개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호수에서 뻗어 나온 안개는 옷을 적실 만큼 두터웠고, 밀도가 높아서 비공정이 안개 밭을 빠져나갈 때는 몸에서 차가운 손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배꼬리 끝에 서 있던 블나이가 아쉬운 탄식을 흘렸다. 어느새 뒤로 다가와 있던 델프림이 블나이 앞의 난간을 턱 잡았다. 밤사이의 일을 상기하느라 멍해져 있던 블나이가 짜증스레 눈썹을 찌푸렸다.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델프림은 키득거렸다.

그가 물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가기 싫어?”

별로그런 건 아니지만.”

넌 내 눈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끔은 장식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

장난스러운 대꾸였다. 블나이가 돌아서자, 그 머리카락이 반대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가까웠다. 델프림이 뺨과 눈가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바람이 세서 부질없는 짓이긴 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선 블나이의 목소리가 우산 안에 있을 때처럼 먹먹하게 울렸다. “—….” 델프림은 입술이 달싹이는 모양을 유심히 보다가, 소리를 놓쳤다. 분명 대화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러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듣지 못했다는 제스처로 오른쪽 눈썹을 올렸다. 블나이가 의아한 듯 웃었다.

뭐야. 기껏 말해줬더니.”

다시 얘기해봐.”

싫다.”

떠나온 곳도 보이지 않게 되어서, 그는 선미를 벗어났다. 뱃머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바람에 델프림은 조금 비켜주어야 했다. 비공정에서는 사나운 장난을 자제해야 하는 법이고 마침 블나이의 웃옷이 휘날려서, 코트 단추가 서로 걸려들까 봐 신경 쓰이기도 했다.

그는 블나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헛웃었다. 다른 사람을, 이렇게까지 염두에 둔다는 게 이상했다. 꽤 즐거운 기분이었다.

동도 트기 전 올라탄지라 탑승객이 몇 없었다. 진영서 본 듯한 얼굴의 그 두어 명도 바람이 들지 않는 곳에 최대한 옹송그리고 있어서, 델프림은 거슬리는 일 없이 블나이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지나치게 치근덕거리고 있다는 감이 들었지만 블나이는 그보다 둔감했다. 실제로는 역량이 비슷하겠지만 블나이는 델프림과 있을 때 좀 방심하는 데다가, 델프림은 상대의 첫인상이 몽유병자인 만큼 낮잡는 구석도 있었다.

그러니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아마도.

블나이는 위험스레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언제든 하늘하늘하게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있었고, 델프림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비어 있을 함에 보석을 채워 가라앉히고 싶기도 했다. 그는 블나이의 팔목을 휘어 당기며 곁에 섰다. 블나이는 별 저항 않고 투덜거렸다.

귀찮게 하는군.”

귀찮기만 해? 정말로?”

곧장 그렇다 대답할 줄 알았는데, 블나이 쪽은 의외로 조용했다. 등 뒤에 선 한 일행이 시시덕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비밀연애 하는 꼬락서니였다. 델프림은 어째선지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으로 되물었다.

내가 성가셔?”

당연하지 않나?”

이번에는 대꾸가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하고 손을 놔주는 델프림 옆에서, 블나이는 전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근래에는 이렇게 마냥 쳐다보고 있을 때가 늘었다. 그 자신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다만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델프림의 검은 머리칼, 희고 젊은 피부며 섬뜩할 정도로 물이 깊은 눈동자를 살피는데 시선이 딱 마주쳤다. 델프림이 농담조로 말했다.

예전엔 지금보다 귀염성이 있었는데.”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 수영할 때 있잖아. 너 예뻤어. 아도니스를 갖다 붙여도 될 정도였거든? 어쩌다 이렇게 삭막해져선.”

……지금은 안 그런가?”

?”

지금은 안 예쁜가?”

까탈스러운 목소리로 이따위 소리를 지껄이니, 델프림은 잠시 제정신을 붙드느라 힘겨웠다. 금이 간 도자기처럼 빛이 드는 파란 눈이 그를 향해 있었다. 한 가닥 사심 없는 의문이란 걸 알면서도 찬바람에 발갛게 상기한 뺨을 보고 있자면 손을 뻗어 만지고 싶어졌다. 델프림은 그렇게 했다.

손끝으로 쓸어내리다가, 재빨리 꼬집었다.

.”

블나이가 짜증 부리며 물러섰다. 델프림은 안도하며 웃었다. 어젯밤에도 잘만 참았는데, 이제 와서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이게 뭔진 몰라도 그는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의 자존심이었다.

내리자.”

델프림은 여상하게 말한 뒤 비공정을 뒤로했다. 기체가 천천히 멈추어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던 블나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따라갔다.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시뻘겋게 비쳐 드는 태양 빛이 델프림의 목덜미를 붉게 데우고 있었다.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겨우 영지에 들어서자 이미 늦은 오후였다.

마차가 드는 길을 천천히 밝히는 조명이며, 기름을 아낌없이 부은 촛대. 귀부인 취향대로 화려한 저택이었다. 야심차게 생화를 꺾어다가 꾸며 놓아서 고전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 본관 양쪽에 선 탑 지붕은 버섯이나 머랭처럼 둥글었고 외벽은 새로 단장했는지 멀끔하게 희었는데, 대문이 시종일관 열려 있어서 보안에 신경 쓰는 작태는 아녔다. 블나이는 어린 시절 지냈던 저택을 상기했다. 그곳은 모든 건물이 뾰족하고 강퍅한 첨탑처럼 생겨먹어 어디에 있든 갇힌 것만 같았다.

장미 향기가 강하게 풍겼다. 실제 꽃에서 나는 것은 아니었고, 정원에 자리한 커다란 분수 물에 향유를 섞은 듯했다. 블나이는 헛웃었다. 그는 짙은 화장이나 향낭 같은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들은 안방에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축이었다.

그때 그는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이미 마차에서 내려 열린 무도회장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이대로라면 델프림과 함께 이름이 불릴 것이었다. 모든 인사가 블나이와 델프림의 동시 입장을 알게 될 거였다. 블나이는 왠지 그게 부끄러웠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델프림이 곧장 의아한 듯 돌아보았다. 블나이가 말했다.

먼저 들어가. 나는 주변 좀 돌아보지.”

? 웃긴 소리 말고 이리 와.”

델프림이 손을 낚아챘다. 블나이도 별수 없이 거기에 응했지만 들어서기 전에 잡은 손을 후다닥 털어내는 건 잊지 않았다.

무도장 천장은 무척 높았고, 회장 전체에 음악이 들리게 할 셈인지, 오케스트라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하필이면 지휘자가 첫 연주를 멈추었을 때 그들이 들어섰다. 둘의 이름이 불리자 좌중이 웅성거렸다. 이번 전쟁에서 작지 않은 공로를 거둔 이들이었다.

델프림이 속삭였다.

잘 보이면 좋을 사람들이야.”

이 무도회, 황실 주최가 아니지?”

당연하지.”

블나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당연히 필수 참석에 준하는 행사일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델프림이 고르고 고른 잘 보이면 좋은 기름기 귀족의 살롱 주최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제야 떠올리건대 그렇다면 블나이에게도 초대장이 왔었겠지. 이러나저러나 그는 휘황한 핑계로 거절했겠지만 말이다.

심지어 두 사람이 함께 입장했단 소식에, 이제 막 도착한 인사들이 술렁거리며 다가왔다. 블나이에게는 역겨운 사람 파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델프림이 피식 웃더니 블나이를 휙 밀었다. 오케스트라와 긴 만찬 테이블이 있는 곳이었다.

배려를 알아챈 블나이는 감독하는 대신, 제일 소박해 보이는 조그만 레몬 파이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음료수를 들었다. 마셔보니 달콤한 샴페인이었다. 대낮부터 술이라니 다들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는 뼛속까지 군인이었으니까.) 블나이는 바로 잔을 바꿔 들었다. 이번에는 진저에일로, 입안에 늘척거리며 달라붙긴 했지만 정신이 흐려지는 것보다야 나았다.

빈속에 시고 단 디저트와 탄산수가 들어가자 울렁거렸다. 멀리에서 델프림이 군중에 둘러싸인 모습이 보였다. 케이크처럼 겹겹이 쌓인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 가냘픈 몸에 달라붙는 파티 복장의 여자들, 또 영웅을 찬미하는 젊은 남자들. 늙은 승냥이들은 테이블 앞에 앉은 채 그들을 훔쳐보았다. 델프림이 먼저 다가올 거라고 확신하는 야비한 얼굴이었다.

기실 사교계의 흔해빠진 풍경이었으나 블나이에게 익숙지 않았을 따름이다. 몇 번이나 승전 무도회에 참가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본격적인 살롱 파티에 초대받은 건 처음이었다. 아니, 아니지. 델프림이 무작정 데려왔으니 초대라고 하기에는 뭣하다. 블나이는 델프림을 가볍게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진저에일을 홀짝이고 있었다.

블나이 옆에서는 하인들이, 열심히 유리잔 탑을 쌓고 있었다. 톡 치면 무너질 것 같은 얄팍한 잔을 카드 탑 형태로 쌓아 맨 위에서 술을 부으면 샴페인 분수가 된다. 그 황금빛 사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퍽 많았고 새로 시작된 유행이었으나 블나이 눈에는 장미를 칠하는 병정처럼 쓸데없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 장난감 같은 사태 속에서 방심하고 말았다. 블나이의 팔꿈치가 맨 밑줄에 쌓인 유리잔 하나를 건드린 건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다.

이런.”

그는 일이 터지기도 전에 모든 걸 알아챘다. 몸 위로 유리 조각이 쏟아질 터였다.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하인이 모든 죄를 뒤집었을 터였고 그건 그다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눈에 파편이 들어가지 않도록 눈을 감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몸으로 받아낼 생각이었다.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오케스트라의 음악 소리며 홀을 울리던 구두 소리,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뚝 멈추었다.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델프림 경블나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사위가 적막했다. 누군가 흘린 탄식, 입 밖으로 나갈 뻔한 비명을 아슬아슬하게 막은 표정의 여자들. 그들은 델프림과 블나이를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서 있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마저 멍청한 얼굴로 델프림을 보고 있었다.

그때 델프림이 팔을 들어 올려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술이 뚝뚝 흘러 떨어지는 얼굴로 하인에게 명령했다.

수건.”

그제야 허둥지둥 닦을 것이 건네졌다. 사람들은 유리 조각에 피라도 날까 봐, 그보다는 옷에 더러운 게 묻을까 봐 두려운 듯 주춤거리며 물러서면서도, 안타까운 듯 서로 소곤거렸다. 블나이는 그 가식적인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초한 일이었다.

그는 죄책감에 이를 악문 채 자신을 밀고 자리에 선 델프림을 끌어당겼다. 수건을 빼앗고, 여전히 눈 감고 있는 남자에게서 겉옷을 벗기고, 주변에 허리 숙여 양해를 구한 뒤 그를 2층으로 끌고 올라갔다. 화장실과, 휴게실(주로 커튼 뒤의 애정행각이 목격되는)이 있는 곳이었고, 그들은 휴게실에 들어가 커튼을 쳤다.

블나이가 딱딱한 얼굴로 돌아서니 델프림이 능글맞게 웃는 게 보였다. 뺨에는 생채기가 나 있었다. 델프림이 무어라 농으로 넘기기 전에 블나이가 닦달했다.

이만한 게 다행이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마치 화가 난듯한 목소리여서, 그는 스스로 멈칫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도 뾰족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블나이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델프림은 받아 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면직물이 상처에 닿아 따끔거렸다. 조금 찡그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대로 있었으면 네가 다 뒤집어썼어.”

내가 건드린 거 맞다. 그런데 너는!”

그래서?”

델프림이 비죽 웃었다. 빈정거리는 표정이었는데, 블나이는 그보다 뺨에 난 상처가 더 신경 쓰였다. 델프림은 자신의 미모를 자랑스러워하는 편이었다. 물론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멋진 방패에 굳이 흠을 낸 기분이었다.

그래서, 중위님. 제가 두고 봐야만 했다는 겁니까?”

느물거리는 목소리. 블나이는 제 분을 못 누르고 마른세수했다. 이럴 때 직급을 들먹이다니.

다른 사람 눈에 델프림은, 자신의 직속 상사를 보호한 충성스러운 군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델프림은 공으로 행동한 게 아니었다. 그도 나름 얻을 것이 있었고 블나이는 그걸 알았다.

하지만 이런 식은.

말하자면, 블나이는 보호를 빙자해 감시당해 온 사람이었다. 분노가 사그라들자 점차 어쩔 줄 모르겠어져 그는 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그를 보고 델프림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그리고 덧붙였다. 장난스레. “여기로 데려오길래 난 반하기라도 한 줄

농담할 때인가, 지금이?”

아니면 고매한 희생자라도 돼주길 기대해?”

너 눈이 멀 뻔했어.”

…….”

그럼 난…….”

델프림이, 술에 젖어 끈적거리는 머리칼을 헤집었다. 수건을 던져버리고 그는 블나이 곁에 가서 앉았다. 친근하게 무릎을 부딪쳐오는 게 영락없이 평소의 델프림이었다.

블나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자, 풀죽은 표정이 드러났다. 델프림은 웃음을 터뜨렸다. 눈매가 예쁘게 휘었고, 조금 전 닦아내어 흰 얼굴은 찬란하게 빛나는 데다가, 달콤한 향기를 뿜었다. 블나이는 부끄러운 심정으로 겨우 시선을 마주쳤다.

델프림이 말했다.

넌 이게 문제야. 항상 너무 진지하다니까. 그때도 그랬지. 네가 날 못 본 체했다면. 위험한 가능성을 감수하거나, 강력한 경쟁자가 생길 일도, 성가신 무도회에 끌려와서 사고 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그는 아주 쉽게 자신이 없는 타인의 삶을 이야기했다. 그저 살아남는 것 따위는 목표가 되지 않는다는 투에 블나이가 찡그렸다. 블나이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살았으므로.

게다가 이제 와서 이런 소릴 하다니. 그는 자신이 델프림에게 선행을 베풀었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냥, 누구나 그렇게 했을 테니까……. 전우를 버렸다면아버지와 똑같은 인간이 될 뿐이었을 거다.

그런데 델프림은 늘 그 일을 들먹거렸다. 블나이가 신기한 종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건 일종의 감탄이었지만, 블나이에게는 찬사처럼 들렸고 거북스러웠다. 그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게 뭐라 할 수도 없어서 미묘한 감정을 홀로 삭였다. 대신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너도 나와 같은 걸로 하자.”

?”

우리 한 번씩 서로를 구했으니까. 맞지.”

델프림은 거의 멍한 무표정으로 블나이를 마주 보았다. 같다니, 뭐가. 전장에서 죽어야 할 사람을 끌고 나온 것과 그깟 술 무더기 좀 맞아준 게 같은 일이란 말인가? 샴페인 샤워는 축하의 의미로도 한다. 만일 델프림이라면 가망 없는 전우를 고기 방패로 썼을 것이다.

그는 웃지도 못하고 있다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셔츠를 훌훌 벗어 던졌다. 블나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옷장에 보관돼있던 남의 옷을 챙겨 입었다. 본래 착장보다야 값싸고 평범하긴 했지만 여러 가지 일에 대비해 준비해뒀을 터였다.

바깥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분위기를 만회해보려는지 들어왔을 때보다 경쾌한 음악이 흘렀다. 블나이는 신경이 소모되었다는 이유로 나가려 들지 않았다. 덕분에 델프림이 쟁반에 디저트와 술을 들고 오는 심부름을 했다. 블나이는 어제도 음주했다면서 샴페인에는 손대지 않았다. 실은 직전의 일 때문에 거부감이 느껴진 거였지만.

델프림은 다 안다는 듯 웃고, 샴페인을 쭉 삼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한 손을 블나이에게 뻗었다. 비공정에서 그랬듯 에스코트하려는 것이었다. 블나이는 이번엔 피하는 대신 그 손을 쥐었다. 조금 놀랍다는 듯 델프림이 웃었다.

블나이가 말했다.

멀미가 나려고 하는데.”

바깥 놀이는 못 하겠네.”

놀이?”

오늘 우린 단상에 서야 할 일이 있었거든. 전쟁 공로자로서…….”

사람 많이 죽였다고 상을 주다니.”

괜히 툴툴거리긴.”

이 방은 복도를 향해 두 겹 커튼으로 막혀 있고, 누구든 드나들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테라스는 말이 달랐다. 커튼으로 덮인 창문을 발견하는 건 고사하고 그게 열리는 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한 사람이 설 만큼 좁은데다 치렁치렁한 벽 장식에, 단차까지 있기 때문이었다.

델프림은 블나이가 무슨 공주라도 된 듯이 다루었다. 달콤한 냄새를 퐁퐁 풍기는 건 본인인 주제에. 블나이는 한숨을 푹 쉬며 반 계단 아래의 테라스로 내려섰다. 평소라면 뭐 하는 짓이냐며 냉정하게 굴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자기가 저지른 짓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고분고분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델프림은 이 상황을 뜻밖의 수확으로 느꼈다. 가끔 블나이 앞에서 헛짓거리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누굴 도와준다거나, 일부러 손해를 본다거나. 이런 행동이 어째서 마음에 드는지는 몰라도 취향이란 게 뭐 그런 것 아니겠는가.

테라스 오른쪽에는 2층 복도와 연결된 창문이 달려 있었다. 그곳을 통해 음악이 흘러나왔다. 박자나, 희미하고 잔잔한 선율. 테라스는 사람 너덧이나 설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좁아서, 설마 춤을 신청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블나이는 뒤늦게 그 곡을 알아들었다.

왈츠. 블나이가 더 잘하는 종류였다. 그나마 얌전하게 출 수 있는 곡이기도 했다.

델프림은 내심 블나이가 거절할 줄 알았던 탓에, 두 손을 맞잡고 있을 뿐 별달리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서 블나이가 먼저 시작했다. 델프림의 허리로 손을 옮기고 발을 엇갈리게 놓았다. 델프림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갈아입은 옷은 셔츠 한 장뿐이었으므로 사람의 온기가 만져졌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조금 뜨끈했다. 블나이는 딱 한 모금 마신 게 다인데도 취한 기분이었다. 승전 무도회라니. 그것도 진짜 군인들이 가는, 적당히 헐렁하고 천박한 곳이 아니라, 데뷔탕트 치러야 할 듯한 사교석.

나한테 이렇게 구는 건 너밖에 없어, 델프림.’

안 움직일 거야?”

말하자마자 델프림이 스르륵 스텝을 밟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블나이는 얼결에 딸려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서로의 어깨 너머를 보고 있는지라 델프림이 어떤 표정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블나이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는 건 상대도 자기 얼굴을 확인 못 한다는 얘기니까. 그는 뺨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술도, 격한 운동 때문도 아니었다. 이제 인정할 때가 됐다.

어젯밤 블나이는 잠을 못 이루었는데, 느지막이 기어들어 간 막사에 눕자마자 옷에 밴 델프림의 체취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질 낮은 군용 담요를 끌어 올리고 몸을 뒤척거렸으나 간이침대 삐걱대는 소리에 정신만 더 사나워졌다. 블나이는 처음으로 전장에서 수치를 느꼈다. 민간인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관학교 동기에게 잠시나마 꼴렸다는 이유로…….

일생에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놀랍게도 그 밤, 블나이는 해방감을 느꼈다. 집을 나온 이래 처음으로 진정 그곳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바라서는 안 될 것을 욕망하는 순간만이 그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번이 처음이었고, 어쩌면 내일은 말짱해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숨도 쉬지 못하고 헐떡거린 건 단지 나에게도 원하는 것이 있다는 새로운 관념 때문이었다.

잠든 뒤에는 델프림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숲속에서 그들은 오랫동안 춤을 추었다. 맞닿은 몸의 열기가 선명해 눈을 뜨면 열병처럼 달아오른 자기자신의 체온이었다.

이런 진실을 전부 다 이야기해줄 수는 없었다. 분명 엄청나게 비웃을 테니까.

상념에 빠진 블나이는 저도 모르게 델프림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원래 왈츠라는 게 가볍게 맞닿은 채 추는 춤이기는 하지만, 델프림은 무심코 이건 너무 밀착하지 않았나 싶었다. 나쁜 심정은 아니었기에 그대로 두었다. 오히려 반가워할 일이지. 블나이의 심장이 뛰는 게 다 들렸다.

평소에는 이런 포옹 따위 역겨워하는 주제에. 델프림이 몇 번인가 장난삼아 어깨동무를 청해도 어린 뱀처럼 빠져나가기만 했었다. 이렇게 접촉해온다는 건 델프림에 대한 경계가 녹아졌다는 거였다. 그는 자신이 이 순간을 위해 여태까지를 견뎠노라고 생각했다. ‘견딘것치고는 제법 즐기기도 했지만 말이다.

블나이가 짓고 있을 표정이 눈에 선했다. 자기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고 멍해져 있거나, 곰쓸개 씹은 것처럼 멀미하는 얼굴일 터다. 그런 생각으로 슬쩍 상대편을 엿본 델프림의 입매가 굳었다. 블나이는 꼭 첫 몽정이라도 한 것 같은, 부끄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왈츠고 뭐고 유야무야되기 직전 블나이가 델프림의 멱살을 쥐었다. 확 끌어당기는 바람에 델프림은 다시 블나이를 거의 껴안게 됐다. 그는 오래간만에 당황하고 말았다. 불가항력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뭘 웃나?”

아니멱살을 잡으면 춤이 아니잖아. 나랑 싸울 거야?”

비슷하다고 생각하든가, 그냥, .”

참으라고 블나이는 말했다. 델프림은 기꺼이 그러마하고 눈 감으며 블나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마치 연인들의 블루스 같았다. 한밤의 꿈이라 할지라도. 숲의 여왕을 납치해 이 밤을 길게 길게 늘이리라. 영원히 깨어날 수 없도록.

누군가 깔깔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음악이 더욱 짙어졌다. 그들은 밀회 중인 연인 같았고, 그걸 깨달은 순간 블나이는 몸을 굳혔다. ‘이러고있는 걸 들켜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게 이상한 일인가,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몸을 빼고 싶지 않았다.

갈등하는 걸 눈치챘는지 델프림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만히.”

누구한테 명령

너 있지.”

델프림은 블나이의 귓바퀴에 입술을 바싹 붙이고 있었다. 평범한 감촉인데 오싹 소름이 돋았다. 블나이가 델프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결을 피하려고 한 것인데, 델프림을 자극하는 셈밖에는 못 됐다.

비공정에서뭐라고 했어?”

블나이는 잠시 그 말을 못 알아들었다. 바깥 사정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복도 쪽에서 커튼을 걷고 들어온 커플이, 창문 한 장을 두고 그들과 대치 중이었다. 물론 대치 중이라는 건 블나이의 생각일 뿐이었고 델프림이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뭐라고 했냐고.”

델프림이 재촉했다. 블나이는 스르륵 입술을 열고 대꾸했다. “꿈을 꿨다.”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가 찡그리며, 상대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델프림은 이미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몸에 힘이 빠졌다. 별것도 아닌 일로 온종일 전전긍긍한 기분이었다. 블나이는 한숨을 폭 쉬곤 파트너에게 몸을 기댔다.

그가 말했다.

너와 있으면 내가 우스워지곤 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테라스 밑은 미로 정원이었다. 말이 미로지, 얕은 관목으로 꾸민 터라 사람 허벅지까지밖에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높고 희게 벼린 분수가 잘 보였다. 돌고래, 여신, 요정과 맹금이 조각되어 있었다. 맨 위에 선 요정이 높이 들어 올린 물병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얼굴을 불그죽죽하게 물들이는 낙조가 점차 가라앉았다. 블나이는 슬슬 몸이 시리다고 생각했다. 각종 식물에 둘러싸여 이 부근만 공기의 밀도가 높았고 축축했다. 그가 이제 들어가자고 말하려는데, 델프림은 도무지 허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 말도 없었다.

블나이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널 찾지 않겠나?”

나보단 널 찾겠지.”

그럼…….”

조용히 해. 안에서 듣잖아…….”

한철처럼 차가운 투였다. 블나이는 움찔하며 저항을 멈추었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화가 났나 싶었다. ‘그래, 우스워진다니,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

반면 델프림의 얼굴에는 복잡한 신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게 몸을 떨어뜨릴 수 없는 이유였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이렇게 있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깨 위에서 꼼질거리는 손가락이 자꾸 그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그는 짐짓 심각하게 생각했다. ‘내가 얠 좋아하나?’ 사춘기 소녀가 웃고 갈 의문이었다만 그에게는 진지한 고민이었다. 델프림은 진정으로 누군갈 탐해본 적이 없었다. 가지고 나서는 버리는 게 순리였고 청렴하진 못할지언정 빠르게 질렸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반짝반짝해 보였던 새것은 손에 쥐는 순간 헐어버렸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블나이를 버릴 때는 이미 지나버린 게 아닌가……. 갖고 논다기에는 오랜 세월이 지났다.

분수에서는 장미 향기가 났다.

블나이는 혼곤한 기분으로 겨우 몸을 떨어뜨렸다. 돌이켜 보니 한 시간이나 이러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일을 함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말하려고 델프림을 본 순간 그는 말하려던 걸 까무룩 잊었다.

……소위.”

그가 물었다.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블나이는 한 번도 이런 얼굴을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경계하거나 두려워했다. 혹자는 존경하는 척도 했지만 그건 결국 뛰어넘고자 하는 마음에 지나지 않았다.

왜 그런 얼굴인가? .”

델프림은 그중 무엇도 아닌 표정을 하고 있었다. 블나이의 짤막한 식견으로는 분간하기 힘든 시간이 지났다. 황혼이 지나자 금세 어둠이 내렸다.

그의 전우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창문을 열고, 커튼을 거칠게 걷어버리고선 놀란 연인들을 뒤로한 채 나갔다. 블나이는 그때 그 소위의, 무뚝뚝한 군홧발 소리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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