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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달 현대AU

나사르 본주 2017. 6. 29. 18:00




  너, 울더라. 크로키 수업 때. 레오나드가 말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시세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격 나쁜 자식. 누가 듣는다면 남말할 것 없단 소리를 들을 생각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시세로는 빈정대는 표정으로 이를 드러냈다. 레오나드는 아무래도 상관 없단 듯 소파 위에 누웠다. 딸각, 붓을 세게 놓는 소리. 레오나드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시세로는 그 방자한 자태를 보며 헛웃었다. 


  "이 꼴을 애인이 봐야 하는데."

  "시세로, 여자 생겼어?"

  "니 여친 개자식아."

  "맞다, 시세로. 나 모델 필요해."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세로는 레오나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빈 캔버스 안을 흘끗, 다시 레오나드. 레오나드가 피식 웃었다. "왜 대답 안 해?" "대답 해야 하나?" "모델이 필요하다고." 레오나드는 자세를 고쳐서 옆으로 드러누웠다. 시세로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왜 나 안 봐?" "미친 새끼."


  미친 천재 놈. 상종 못할 예술가. 시세로는 거의 완성되어가는, 아니, 이미 완성품 이상의 작품성을 내고 있는 레오나드의 그림을 보았다. 시세로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다. 침을 삼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세로는 레오나드의 그림을 볼 때마다 압도되는 경이에 치를 떨었다. 종교적인 색이 있는 듯 하면서도 전위적이었다. 그가 그리는 인체는 존재하는 사람의 몸보다 육감적이었다. 그림만이 나타낼 수 있는 것을 모조리 시도해보는 듯한 화풍을, 시세로는 감당해낼 여력이 없었다. 그는 작품에 온 정신을 쏟는 타입이었다. 바로 뒤에서 천재가 다 된 그림에 깔짝거리는 것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시세로는 입을 다문 채 자리에 앉았다. 이젤에는 다시 스케치만 덜렁 남은 화폭이 놓여 있었다. 이게 몇 개짼지. 아마,


  시세로는 붓을 떨어뜨렸다.


  "조심해야지."


  내 애인은 장례식에 갔어. 먼 친척분이 돌아가셨다더라. 말을 하면서, 레오나드는 시세로의 손에 다시 붓을 쥐여주었다. 손등과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천천히 움직였다. 시세로의 몸이 얼어붙었다. 붓이 몇 번 지나가자 양감이 진 사물이 나타났다. 아니, 그리려던 건 평면 추상화인데. 생각하면서도 시세로는 뿌리치지 못했다. 레오나드가 나직이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넌 왜 안 갔냐?"

  "뭘?"

  "장례식 말이다."

  "아, 그거."

  "약혼자잖아?"

  "같이 가달라는 말 안 했으니까. 결혼 앞두고 장례식 가면 운이 나쁘단다."


  챙강, 하는 거친 소리가 났다. 책상다리를 발로 찬 시세로가 숨을 밭게 몰아쉬었다. 레오나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에 상처가 나 있었다. 팔레트나이프가 떨어지며 찍힌 모양이었다. 시세로는 묵묵히 널브러진 팔레트를 바라보았다. 물감이 모조리 섞여버렸다. 레오나드는 다가서서 바닥에 묻은 물감을 발로 뭉갰다. 핏방울이 뚝, 떨어졌다. 상처가 깊은지. 붓을 주우려는 레오나드의 팔을, 시세로가 막았다. 그는 레오나드의 손을 붙잡고 상처를 입에 머금었다. 레오나드의 표정이 기묘하게 기울었다.


  "벌려 봐."

  "뭐?"

  "입 벌려."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긴 손가락이 잇새를 파고들었다. 자칫 물어 뜯을 뻔한 시세로는 기겁하며 입술을 열었다. 손목을 붙잡은 힘이 세졌다. 신경 쓰지 않고, 레오나드는 혀 위를 꾹 눌렀다. 비린 철맛과 엷은 물감 냄새가 났다. 시세로는 설핏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모델이 필요해. 남자 누드로." "뭐?" "애인이 질투하니까 빨리 하자." "뭘?" 시세로는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네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레오나드는 웃었다. 입 안을 압박하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시세로는 제 턱을 문지르며 허전한 느낌을 달랬다. 레오나드의 다정하고 얌전한 웃음이 유독 악마 같았다.


  "너, 아직도 눈이 빨갛다. 뭐 그런 걸 보고 우니. 교수님도 이상하게 보더라."

  "닥쳐. 도강했냐?"

  "응. 예쁘더라고." 한숨 소리.

  "또라이 새끼."

  "있지."


  레오나드는 피가 멎은 손을 바라보았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손가락, 시선을 두는 것이 어색해서 시세로는 입을 감싸고 고개를 돌렸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레오나드는 소파에 앉았다. 측면에서 보면 완성과 미완성의 두 작품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선 시세로를 주시하는 눈길에 이채가 감돌았다.


  나, 너를 그릴래. 레오나드가 말했다.



출처: http://rilly1019.tistory.com/entry/커미션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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