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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더시리즈 2차창작/케이토&티르(논커플링)
겨울 밤이다. 반시간 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북풍은 멈출 기세가 아니니 새볔녘이면 정강이가 잠기도록 쌓일 것이다. 안개 짙고 얼어붙은 아침길은 노약자와 성질 급한 어린이에게 나쁘다. 보안관 조수는 아마 눈이 그치자마자 일어나 삽질을 시작해야 할 테다. 티르 스트라이크가 눈을 치우고 얼음에 흙을 뿌리는 일을 즐겨하는 참된 공무원은 아니지만, 지금 그의 걱정거리는 따로 있었다. 이십분 후면 케이토가 저녁식사를 하러 온다. 그리고 지금 티르의 시선 아래에는 밑이 까맣게 탄 수프냄비가 있었다.
아주 잠시 나갔다 왔을 뿐이다. 요란하스 부인이 친절하게도 바질을 조금 나누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마침 토마토를 요리할 예정이었으니 반가운 제안이었다. 미레일이 숟가락으로 그레이비접시를 엎지만 않았어도 계속 감사했을 것이다. 어떻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저녁식사를 허벅지에 떨어뜨린 미레일은 새된 비명을 질렀고, 요란하스 부인은 급히 그 애를 데려다가 찬물로 씻길 수밖에 없었다. 엉덩이를 몇 대 때려주는 소리도 났다. 그만큼 허비한 시간이 추가되었다는 소리다. 덤으로 받아온 말라빠진 통마늘이 죽은 토마토를 교화시켜주지는 못하겠지.
비록 스튜를 다시 만들게 생겼지만 긍정적인 전망은 있다. 갑자기 쏟아진 폭설과 궂은 바람 탓에 케이토의 채비가 늦어지리라 기대할 수 있다는 것. 부정적인 사실은, 걸음이 느려보았자 한 동네이며 케이토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 늑대란 것 정도.
그러나 이 스튜는 정말 못써먹을 것 같았다. 적어도 대접용으로는 그랬다. 티르는 내용물을 버릴 요량으로 냄비를 들어올렸다. 그때 문이 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주먹을 뒤집어 든 어색한 자세의 케이토가 놀란 눈으로 집주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려있었어.”
“아, 아까 내가 못 닫았나보네. 들어와.”
“성난 저녁이지. 추위도 추위지만 바람소리가 귀를 찢을 것 같아.”
케이토는 노크하려고 쥐었던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바람부는 서슬에 기껍게 열린 문을 닫고 발깔개 위에서 눈묻은 옷을 털기 시작했다. 손님을 맞으려던 티르는 자신의 꼴을 눈치채고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지금 아기자기하고 실용적인 티르스트라이크표 오븐장갑을 낀 채 막 완성된 요리를 식탁에 올리려는 모습이었다. 누가봐도 이 냄비 안에 먹음직스러운 저녁식사가 들어있다고 여길 것이다. 실제로 그랬는지, 케이토가 입을 열었다. “스튜?” 케이토의 표정은 미심쩍었다. 태운 비지처럼 풍기는 음식내음을 맡은 모양이다. “좋은 메뉴인데. 오늘처럼 추운 밤에는 말이야.”
말하며 외투를 벗은 케이토가 자리에 앉았다. 티르는 어쩔 수 없이 냄비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아마 이 정중한 친구라면 집주인이 민망해할만한 쓴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토마토와 바질을 넣은 요리에서 왜 돼지고기와 겨울무를 넣고 뭉근히 끓인 냄새가 나는진 설명 못하겠지만. 케이토는 자기 몫의 그릇을 받았다. 그들이 함께 먹을 저녁식사는 갈색이었다.
토마토스튜 맞다. 젠장.
티르는 잠시동안 케이토가 약혼자를 죽인 남자와 이 스튜 중 무엇을 더 맛있어할지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재료를 넣고 멀쩡하게 끓였으니, 조금 탄 말짱한 맛이 나겠지. 케이토는 무던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티르는 따라하듯 한술 떠먹었다.
식감이 뭉클하긴 했지만 뜨끈한 온도가 적당해서 먹기 괜찮았다. 바질향이 독보적이고, 뒤늦게 첨가한 양파의 애매한 아삭함, 감칠맛을 내는 달큰한 사과향… 그리고 겉을 태운 듯한 고기냄새… 아마 토끼고기? 최대한 비슷한 것에 비유하자면 비프콘소메수프 맛이 났다. 물론 고기는 한 점도 넣은 적 없다. 어제 저녁 이파리보안관이 남긴 치킨스톡을 썼을 뿐이다.
식어빠진 야채스프보다는 나은 맛이었다. 티르는 슬쩍 케이토를 바라보았다. 케이토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얼굴이었다. 물론 그는 지독하게 맛없는 음식을 입에 넣는대도 상대가 절친한 이인 이상 찡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입안에 든 것을 오묘하게 음미하는 것 같던 케이토가 고개를 들었다.
“토끼고기인가?”
“토마토야.”
케이토는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그렇군.”
넉넉하게 끓여 양이 많았다. 추운 날 먹기엔 그럭저럭 괜찮은 음식이라, 티르는 두 그릇을 비웠다. 케이토는 깨끗하게 먹고 나서 냄비 안에 조금 남은 잔해를 보더니, 그대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배가 불렀을 것이다. 점심을 든든히 먹었나보지. 맛이 별로인 게 아니라 배가 부른 거다. 티르는 필사적으로 요리사적 자존심을 지켜내며 입을 닦았다.
“근사한 요리였네.”
“요란하스 부인이 마늘을 줬어. 가져갈 텐가?”
“좋지.”
잠시 침묵이 일었다. 든든한 식사 뒤에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배부른 고요함이었다. 케이토는 편안히 기대어앉은 채 서릿발 낀 창문을 보고 있었다. “겨울이야.” 그가 나직이 말했다. 티르는 그 시선을 따라 창가를 보았다. 따스한 안과 달리 매서운 북서풍이 험한 소리를 내며 불고 있었다. 송글진 결로가 거뭇하게 변해가는 나뭇바닥에 똑똑 흘러내렸다.
“겨울이지.”
데운 몸이 노곤했다. 티르는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