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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자 이상 단편 커미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독한 기름 냄새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에스텔은 붓을 쥔 손을 무릎에 포개며 의식적으로 허리를 곧게 폈다. 붓질 하나하나에 집중하느라 뭉그러진 시야가 선명하게 돌아오며, 화폭이 전체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림의 변색을 우려한 탓에 갈색 벨벳 커튼을 쳐둔 이 방은 캔버스 속 색채만큼 부드럽지는 않았다. 차갑고 창백한 안색의 조도에 힘입어 그림은 본래 입은 옷보다 확연히 아파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버릴 것 없이 잘 그려진 그림이었다. 부족한 점은 조금씩 보완하면 될 것이었다. 에스텔은 점점 할 수 있는 것이 늘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편안하게 느껴져 그것만은 기뻤다. 이 완연한 병색 아래에서도.
에스텔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물감과 세정제 냄새가 아무리 심해도 작업을 집 안에서만 하기로 결정한 건 실버 때문이었다. 실버는 계속해서 병증이 심해져 가고만 있었다. 내색 안 하려는 듯 설거지를 하거나 가끔 수프를 끓이고, 아침마다 침대를 정리해 놓기는 했지만 늦은 오후 일어나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에서는 일전의 어떤 찬란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작업이 수월하게 풀려 들떴던 마음이, 흠뻑 젖어 몸에 붙는 낙엽처럼 착 가라앉았다. 에스텔은 벌떡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커튼을 확 젖히자 오후의 살가운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잠시 눈을 감은 채 뺨을 간질이는 빛을 음미하던 에스텔은 손목을 들어 가느다란 팔찌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실버가 선물해 준 시계 팔찌였다.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알람을 듣지 못하고 집중한 모양이었다. 에스텔은 실버를 소리쳐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곤 침실로 다가가서 문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침대 발치에는 불룩한 형체가 없었다. 그 대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버는 불을 켜지도 창을 열지도 않고 침대 헤드에 기대어 어둑하게 번지는 활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에스텔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실버.”
“……응, 에스텔.”
실버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쪽을 돌아보았다. 에스텔은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점심 먹자고 말하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늦은 김에 집에 있는 걸로 요리해줄게.”
“아냐. 너도 배고플 테니까 그냥 시켜 먹자. 음…… 문어 스튜 어때.”
느릿느릿 말하며 실버가 설핏 웃어 보였다. 그가 진실하게 웃을 때와 아닐 때를 에스텔만은 구별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에스텔은 음식을 주문하는 척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그런 그의 노력을 존중해주었다. 다행히 브레이크 타임이 지나 음식을 시킬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문어 스튜라. 지중해의 짠 냄새가 떠오르는 메뉴였다. 에스텔은 작년 실버의 생일날, 다음에는 꼭 바다에 가자고 약속했던 걸 생각했다.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던 터라 잊지는 않았지만, 여행과는 영 데면데면하게 구는 요즈음 실버의 상황 때문에 막상 실행하기가 망설여졌다. 사실, 이즈음 에스텔의 고민은 경제적 문제를 제외하고는 하나뿐이었다.
내일이 실버의 생일이다.
달력에 화려하게 표시까지 해 두었는데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실버가 한숨 짓는 것을 눈치채 버려서, 애꿎은 탁상달력을 작업방에 숨겨 두었다. 에스텔은 침실 문 앞에서 주문 완료 문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본인이 생일을 완강하게 거부한다고는 해도, 날은 지새고 내일은 찾아온다. 당일까지 모른 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스텔은 매년 생일마다 가족이며 친구들의 무수한 선물과 축하 메시지를 받아 왔고,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하루가 있다면 바로 그날이라고, 무심코 흘려넘기는 건 잔혹한 처사라고 여겨온 사람이었다.
실버와는 다르게. 실버는 에스텔을 만나기 전까지 생일을 축하해본 적 없다고 털어놓았다.
마치 이번 해처럼. 끝없는 잠을, 태어나지 않았던 시절을, 청결하고 캄캄한 죽음을 갈구하는 몇 년간의 실버와 같이. 에스텔은 그 우울감을 하루나마 끊어주고 싶었다. 그의 인생에 단절이라는 게 있다면, 어제와 오늘이 분간되지 않는 암흑 속에 단호한 절취선이 있다면 그건 죽음이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날짜였으면 했다.
‘오전 내내 작업에 몰두하느라 실버를 돌보지 못했어.’
에스텔은 굳게 맘을 먹고 거실의 커튼을 죄 걷었다. 남은 하루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사랑하기로, 따뜻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오직 그만을 사랑하기로. 그가 내일 찾아올 아침을 경멸하고 있다면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오늘부터 축하해주기로, 에스텔은 결심했다.
실버는 꿈과 삶의 경계에서 낯선 냄새를 맡았다. 매캐한 향기는 이 공간이 불에 타들어 가고 있다는 심증을 굳혔고, 그는 바닥도 모르는 곳에서 빠르게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뛰어도 숨이 차지 않았고 아무리 호흡해도 괴롭지 않았다. 찬 바람과 따가운 열상이 없는 세계라.
실버의 발걸음이 점점 늦어졌다. 그는 시커먼 암굴 같은 그곳에 가만히 서서 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희뿌연 것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사실 그건 위가 아니라 정면이어서, 실버는 눈을 꽉 감으며 돌아누웠다. 하지만 하얗게 타서 오그라지는 세계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절취선 같은 망각이 그를 집어삼킬 듯이 몸을 부딪쳐왔다. 몹시 추웠다. 더는 버틸 수 없을 만큼.
그는 눈을 떴다.
칼칼한 향신료 냄새가 났다.
털실 양말을 신은 듯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에스텔이 문틈을 어깨로 살짝 밀었다. 그때까지도 실버의 시선은 현실감을 되찾지 못해서, 몸이 이렇게 무거운데 보드랍고 따뜻한 곳에 놓여 있다, 쯤의 생각을 하며 멍하니 허공을 헤집고 있었다. 에스텔이 조심스레 다가와 무릎을 꿇고 침대에 턱을 괼 때도 실버는 단지 이이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입은 옷에서 좋은 냄새가 났는데 자신은 걸친 옷이 축축하게 젖은 것처럼 몸을 움직이기가 싫었다. 에스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실버, 깬 거 맞지?”
자그만 손이 다가와서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그 손이 조금 차가운 것 같아 무심코 잡아주었다. 실버가 말했다.
“……따뜻하네.”
“응. 실버, 열난다. 몸도 차갑고. 조금 더 쉴래?”
“아냐. 그냥 피곤해서 그래. 식사해야지.”
실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억이 물거품처럼 밀려들어 와 그가 가진 백사장에 희미한 자국을 남겼다. 곧 사라질 것 같은 황량한 파도의 무늬를.
이제 그는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집이었다. 둘의 집이었고, 우리의 침실이었고 그가 줄곧 누워 있었던 침대 위였다. 몇 페이지 읽다 만 소설책이 협탁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실내용 안경은 찌그러진 이불 위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분명 삼십 분쯤 전에 들춰보았을 텐데 책 내용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실버는 에스텔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에스텔이 기운차게 웃으며 제 허리에 두 손을 얹었다.
“스튜 왔어! 컨디션 나빠 보여서, 매운 스튜 말고도 뜨거운 샌드위치랑 크림 리소토 준비했으니까 어서 나와.”
“그래.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나갈게.”
“세수도 하고?”
“세수도 하고.”
실버는 부스스 웃었다. 안심한 에스텔이 방을 빠져나가자, 그 미소는 모래사장에 그린 그림처럼 우수수 쓸려나갔다. 방 안은 여전히 스산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며 체온을 되찾고 있었다. 그래서 실버는 이 방 안이 무척이나 춥다고 느꼈다.
커튼을 슬쩍 들추자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서리가 끼어 불투명한 유리창을 의욕 없는 눈짓이 그저 지나쳤다.
그는 묵직하게 동통이 오르는 이마가 왜 이럴까 곰곰이 고민하다가, 자괴감이란 걸 깨달았다. 머리 깨나 빨리 돌아가는군. 중얼거린 실버가 세면대 앞에 서서 얼굴을 훔쳤다. 꼼꼼히 세안할 기운이 들지 않아 그저 물로 헹구고 뻣뻣해지는 피부를 쓸어내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에스텔이 있는 곳에는 어쩐지 온기가 돌았다. 겨울용 슬리퍼를 신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미안해. 혼자 상 차리게 해버렸네.”
“으응, 그냥 그릇에 덜어놓은 것뿐인걸. 어서 와. 기다렸어.”
에스텔은 앞으로 실버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생각했다. 늘 그렇듯 해답의 주인은 묵묵히 의자를 빼고 수저를 들 뿐이었다. 차린 밥을 해치워주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그러나 오늘 실버는 정말 컨디션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가 느릿느릿 식사하는 모습을 턱 괴고 바라만 보던 에스텔이 식탁에 세워 둔 태블릿PC를 만지작거렸다. 곧 스피커 잡음이 섞인 시끄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버는 둔하게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았다. 여행 브이로그였다. 바다가 있고, 흰 벽에 빨갛고 둥근 지붕을 댄 건물들이 개미집처럼 붙어 있는… 여행 도시.
그리스, 라고 에스텔은 말했다.
문어 스튜는 좀 맵긴 했으나 맛이 좋았다.
“여행 가고 싶지 않아, 실버?”
“음…… 글쎄, 겨울인데. 너 감기 들어.”
“꽁꽁 싸매고 나가면 되지! 어때? 겨울 바다!”
“나가고 싶어?”
응, 이라고 대답하려다가 에스텔은 잠깐 머뭇거렸다.
너를 밖으로 내보내고 싶어. 전처럼 함께 마을을 걷고 가벼운 하이킹이나, 자전거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 억새가 우거진 들판을 우석우석 밟으며 들어가서 사진을 예쁘게 찍어달라고, 또 같이 찍자고 떼를 쓰고 싶어.
이 소망은 ‘나가고 싶은’ 게 아니다. 에스텔은 단지 실버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응어리 진, 치기 어린 원망을 에스텔은 내뱉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실버가 좋았으니까, 실버가 옆에 남아 있는 것이 다행스러우니까. 대답을 웃음으로 얼버무린 에스텔이 더 간편한 말을 찾아냈다.
“네 기분이 나아졌으면 좋겠어.”
“난 지금도 좋아, 에스텔.”
실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거기에 깜빡 안심할 뻔했으나, 에스텔은 속지 않았다. 다행인 것과 최선인 것, 그리고 최선과 최고는 다른 이야기라는 걸 그는 느지막이 배운 참이다. 실버는 지금 참으로 다행이게 최선을 살아낼 수 있는 것뿐이다. 에스텔은 잠시 회의에 잠겼다. 예전에 보이던 그의 모습은 뭘까. 착각일까, 아니면 찬란한 오해일까.
실버는 다시 그릇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예 곡기를 끊다시피 했을 때 에스텔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했었다. 그 뒤부터 실버는 억지로라도 접시를 비우곤 했다. 에스텔은 자기 앞에 놓인 리소토에 손도 대지 않고 태블릿 화면을 주시했다. 흥미로운 장면이 나오면 실버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버는 약간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김이 샌 에스텔은 고소하고 미지근한 리소토를 입맛 없이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기 몫을 해치운 실버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스텔.”
“응?”
에스텔이 입가에 크림을 묻힌 채 고개를 들었다.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는지 의아한 기색이었다. 실버는 작게 웃음 소릴 내면서 에스텔의 입가를 엄지로 문질러 주었다.
“갈까. 바다.”
“정말?”
“그리스는 무리지만, 가장 가까운 해변은 버스로 세 시간 정돈데. 오늘 하루 묵고 내일 돌아오면 될 거야.”
“정말 가고 싶은 거지?”
“오랜만에 바람 쐬고 싶어서 그래.”
상냥한 미소를, 믿고 싶었다. 에스텔은 활짝 웃고는 곧 리소토 접시에 코를 박고 먹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실버는 느슨하게 일어서서, 거실로 나갔다. 에스텔이 커튼을 전부 젖혀 놓아 마루에 깔린 얄팍한 양탄자엔 미온한 햇살이 고양이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실버는 잠시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제안을 하고, 잠깐이나마 온전히 연인의 사랑스러움에 빠지고, 마치 그럴 기력이 있다는 것처럼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의미 없이 물건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기도 했다. 에스텔은 청소에 익숙지 않아서 꼼꼼한 부분은 지나치기가 일쑤였다. 에스텔은… 아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실버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줄 수 없을 테니까.
그는 몇 개월 전 에스텔이 이유 없이 사 온 아기 코끼리 조각품을 노려보았다. 그래, 나가서 기념품이라도 사 온다면 에스텔의 기분이 좀 들뜰지도 몰랐다. 예전처럼 마냥 밝게, 아무것도 모르고, 실버가 말과 말 사이에서 헤매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 뒤 도망가 줄지도.
그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다. 다만 에스텔이 지금보다 여유 있고 행복한 환경에서 지냈으면 싶었다. 아무리 몸을 일으켜 보았자 지금 자신은 돈을 벌 수 없으니, 유복한 가정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만나 지핀 열정만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굴 수 있기를. 더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그러니까, 밤새 신경을 곤두세운 채 약한 불빛에 반응하고,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인형을 껴안은 채 주저앉아 있고, 문을 꽉 닫을라치면 달려와 용건이 있다는 듯 구는 다급한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게 있다면, 제 죽음과 에스텔의 회복뿐일 거라고 실버는 생각했다. 그 이외의 문제는 이제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계속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돌아섰다. 에스텔이 가볍게 짐을 꾸리는 동안(그녀는 정말로 여행이 고팠던 모양이다)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통에 손을 담갔다. 물은 그의 체온보다 약간 더 따스했다.
바닷물이 매우 찼다. 짐을 어설프게 내려놓고 쭈그려 앉았던 에스텔은 금세 아린 두 손을 화급하게 털었다. 얼어붙어 흰 파편 같은 바닷물이 살얼음 소리를 내며 다가올 때마다 뒷걸음질 친 덕분에, 등 뒤에 서 있던 실버의 가슴팍에 부딪히고 말았다. 실버가 겉옷을 벌려 얼굴과 손이 빨개진 에스텔을 끌어안았다. 에스텔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달달 떨리는 몸이 느릿느릿 진정되고, 등 뒤에서 일정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붙는다고 해서 긴장한 사람처럼, 연애 초기의 그처럼 두근거리는 소리가 빨라지지는 않았지만,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에스텔이 얼마간 평안을 느끼게 했다.
몸도 마음도 녹는 것을 가만히 느끼던 에스텔이 꼼지락거리며 돌아서서 실버를 마주 안았다.
“스케치북 가져왔는데, 손 꺼내기도 어렵네.”
“가방에 장갑 있어. 줄까?”
“아냐, 이대로 있을래.”
에스텔은 유연제 향기가 나는 실버의 품에 코를 묻고 비비적거렸다. 부드러운 스웨터에 뺨을 비비다가 문득 정전기를 맞은 듯 가슴 어딘가가 저렸다.
실버에게서 실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같은 샴푸를 쓰고, 같은 워시와 유연제와 세제를 쓰기 때문이겠지만 사람 몸에서 그만의 체취가 나지 않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에스텔은 자기 손목을 코밑에 대고 킁킁거리다가 몸이 울리는 걸 느꼈다. 실버가 작게 웃고 있었다.
“왜 웃어?”
“그냥, 귀여워서.”
수줍은 목소리였다.
얼음 바다에 빠뜨린 듯 굳어가던 심장이 단숨에 풀어졌다. 그래, 무엇이 어떻든 실버는 여기 있다고, 살아서 내 곁에 존재해 준다고 되뇌던 에스텔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디까지 내려놓게 될까, 이 기대를. 실버가 나아지고 행복해지리라는 믿음을 언제까지, 과연 얼마나 포기하게 될까.
실은 가장 무서운 건 실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이라는 걸 에스텔은 알고 있었다. 실버를 감시하고, 그에게 애원하고, 자꾸만 그의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자신의 마음 때문이라는 걸. 그렇게 해보았자 실버의 병세에는 도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에는 이 사랑이 너무나 조급했다. 에스텔은, 실버를 돌려받고 싶어 하던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제는 다만 자신의 연인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나누어서 지고 싶을 뿐이다. 그럴 수 없는 무게라고 하더라도.
그와 결혼하고 싶었다.
너랑 결혼하고 싶어, 실버 그레타. 에스텔라스 그레타라는 이름을 불러보고 운 적이 있어. 이런 말을 해버린다면 너는 꿈속에서라도 도망가버리겠지만.
이젠 실버가 잠으로 도망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서 달아나지 않아도 숨을 수 있도록 품을 벌려주는 것이 에스텔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실버의 품에 안겨 온기를 빼앗고 있지 않은가.
에스텔은 실버를 밀어냈다. 그 표정이 적잖게 시무룩해 실버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에스텔, 많이 추워? 어디 들어갈까?”
“응, 춥다. 카페에서 따뜻한 거 마시자. 오다가 봐 놨어.”
애써 어리광부리는 말투로, 에스텔이 말했다. 실버는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에스텔의 손에 입혀 주었다. 그저 들려주면 주머니에 넣어버릴까 봐 손가락 끝자락이 달랑달랑하게 남아도는 것을 손목까지 덮어 씌워주었다. 에스텔은 털실에 묻은 보들보들한 체온을 느끼고는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정말로 따뜻한 초콜릿이 마시고 싶었다.
카페는 바다가 보이도록 통창을 놓은 자리로, 따개비 붙은 바위를 향해 밀려오는 물결이 그대로 보이는 장관을 지니고 있었다. 둘은 좀 춥더라도 창가 자리에 앉기로 했다. 겨울 바다라, 지나가는 사람은 몇 없어 카페를 전세 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라디에이터의 훈훈한 온기와 감미로운 커피 향기에 들뜬 에스텔의 두 뺨이 금세 상기했다.
실버는 그 앞에서 스케치북 표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지를 끼워가며 오래 써서, 두께가 있고 모서리는 부드럽게 닳아빠진 책이었다. 에스텔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길을 가며 건네주었는데, 종이에 번진 목탄 자국을 눈여겨보고서는 차마 넘겨볼 수 없다는 듯 여태 쓰다듬고만 있었다.
종업원이 둘 앞에 바로 마셔도 괜찮은 정도의 핫초콜릿과 손대기도 힘들 만큼 뜨거운 커피잔을 가져다 놓았다. 에스텔은 춥고 출출했는지 금세 잔에 입을 댔지만 실버는 종업원이 계산대 앞으로 돌아가도 잔을 쳐다보지 않았다. 커피 위로 모락모락 김이 솟았다. 아주 뜨겁게, 라는 주문을 충실히 들어준 모양이었다.
에스텔은 동그란 눈동자를 살짝 들어 올려 실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조금 전 앞머리를 쓸어내리더니, 표정도 보여주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멈추어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보이는 눈빛이 사람에게 냉랭하기만 한 바닷물을 연상케 해, 에스텔은 문득 추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혼자 울어버릴까 봐, 그가 울 때 전혀 눈치채지 못할까 봐 눈을 뗄 수는 없었다.
곧 실버가 반쯤 식은 커피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눈가는 붉지도 무르지도 않고 말짱했다. 실버는 태연한 손길로 스케치북을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에스텔은 커다란 잔을 들고 음료를 다 마시느라 그 손가락이 조금씩 떨리는 걸 보지 못했다.
그림들은 주로 목탄이나 연필로 그은 인물 크로키였다. 아주 잠깐 새에 그린 듯 선 몇 개로만 완성된 것도 있었고,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을 자세히 뜯어본 것처럼 이목구비가 크고 선명하게 그려진 페이지도 있었다.
실버는 문득 자신이 거울을 본 지 정말 오래되었다는 걸 떠올렸다. 거기에는 실버가 있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에스텔만의 실버 그레타가.
그는 저도 모르게 코끝을 훔쳤다. 마른 눈물이 다시 날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없어, 에스텔.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태어나서 너를 제외한 시간에는 죽어 있었던 것 같다고, 실버는 심장에 십자가를 그리듯이 웅얼거림마저 삼켜버렸다. 그림 속의 그는 처음부터 웃지 않았다. 간혹 웃는 모습이 있었지만 마치 상상해서 그린 것처럼 다른 것들보다 흐릿했다. 에스텔은 이제 웃는 얼굴을 잊어버린 걸까. 앞으로 내 얼굴까지 잊어버릴 사람처럼.
하지만 그녀는 실버를 그리는 걸 포기하지 않았고, 실버는 천천히 스케치북을 전부 넘겨보았다. 거기에는 그가 기억하지 못한 그 자신이 있었다. 그는 거울이 아니라 제 삶의 잃어버린 장면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잘린 꼬리처럼, 이제는 어떻게 이어 붙여야 할지 모를 자신의 인생을. 거기에는 에스텔의 눈길이 녹아 있었으므로 차마 버릴 수도 없었다.
실버는 스케치북을 테이블에 조심스레 놓고 에스텔 쪽으로 밀어주었다. 다 쓴 스케치북을 여기까지 와서 보여주었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았는데, 그는 그걸 감히 추정하기조차 두려웠다.
“에스텔, 이제 돌아갈까. 지금 집에 가면 밤에 도착하겠지만.”
“실버…….”
“…택시 타도 좋을 것 같아. 너무 추울 것 같으니까….”
“이건 다 마시고 가자.”
에스텔이 살짝 미소 지으며 실버 몫의 커피잔을 밀어주었다. 둘레가 얇은 커피잔에서는 여전히 김이 솟고 있었다. 실버는 무심코 잔을 감싸 쥐었다. 창가에서 마른 종이를 만지던 손은 빨갛게 얼어 관절이 불거져 보였다. 실버의 마르고, 가파른 손길을 바라보던 에스텔이 그 손등을 겹쳐 쥐었다.
“아직 따뜻하잖아. 그치?”
그게 끝이었다. 둘은 우버를 불렀다. 노란 택시의 시트는 푹신했고, 히터를 튼 내부가 아늑해서 둘은 서로 어깨에 기댄 채 졸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온 거리보다 훨씬 가까웠다.
여행은 없었던 일처럼 잊히는 듯했다. 삶은 술수가 교묘한지라, 돌아온 다음 날부터 에스텔에게 의뢰가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실버는 조금 개운해진 얼굴로 거실 청소를 하거나 에스텔의 셔츠를 다렸다. 그는 자신이 방해될까 걱정된다는 이유로 에스텔의 작업실만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덕분에 작업실 창틀에는 눈이 녹고 먼지가 낀 구정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실버는 작업실 문간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다가 그걸 발견하고는 피식 웃기도 했다. 안전한 나날이었다. 실버는, 단 한 번도 자해를 시도하지 않았다.
참는 걸지도 모른다고 에스텔은 생각했다. 얼마나 참고 있을까, 마냥 견디는 건 괜찮은 걸까, 그렇다면 또 무엇을 견디어내려고 하는 건지. 약병 속의 푸르스름한 알약이 줄어가는 걸 확인할 때마다 에스텔은 마음을 졸였지만, 거기에 집중하기에는 너무 바빴다. 결국 에스텔은 다시 작업실을 나누기로 했다. 혹시 몰라 적은 월세를 꼬박꼬박 내던 것이 도움 되었다. 실버는 나날이 얼어붙는 날씨에 에스텔이 감기에 들 것을 걱정했을 뿐, 낮 동안 따로 지내게 되는 데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오히려 에스텔의 속이 타들어 갔다.
“실버, 점심 꼭 챙겨 먹고. 나 기다린다고 간식 안 먹지 말고. 응? 오늘은 꼭 일찍 올게, 너 좋아하는 제과점에서 호두 파이도 사 올 테니까.”
“에스텔. 정말 괜찮아.”
“커피도 떨어졌지? 장은 내가 봐올게. 오늘 날씨 영하권이라니까 환기 너무 오래 시키지 말고!”
“알았어. 걱정 마.”
여태 별일 없었잖아. 마치 자기 몸을 다른 사람한테 맡겨둔 듯 구는 태도가 어색했다. 그러나 둘에게는 이미 단련된 일상이었다. 에스텔은 씩 웃고 모자를 눌러 썼다. 여행지에서 새로 사 온 장갑을 꼭 끼고, 실버가 목도리까지 채비해준 후에야 문고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한창 작업이 잘 풀리는 참이었다. 몇 점의 연작을 의뢰한 구매자가 금액을 높게 부른 대신 시일을 짧게 잡았으므로 한창 바쁜 때이기도 했다. 실버는 에스텔이 찍어 보내주는 중간과정을 모두 보았다. 한없이 여리고 소담한, 지기 직전의 흐드러진 수련을 표현한 유화였다.
사실, 실버는 마음속으로 딴생각을 품고 있었다. 해가 기울기 전 이른 오후에 잠시 장을 보러 다녀올 계획이었다. 에스텔이 깜빡 잊고 있는, 그녀가 좋아하는 홍차 잎을 좀 사두고 최근 잘 먹지 못했던 예쁘고 비싼 디저트도 준비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호화스러운 음식을 차려주고 싶었다. 에스텔은 요새 일에 매진하느라 정작 본인은 끼니를 때우는 둥 마는 둥 했던 것이다. 착실하게 집밥을 먹는 실버 쪽이 살이 오를 지경이었다.
생활 패턴이 얼추 구색을 보인다는 건 그의 상태가 호전되었음을 암시하는 징조였다. 실버는 이제 약을 거부하지 않았고, 스스로 상담사를 알아보기도 했다. 비싼 가격에 늘 돌아서고는 했지만, 무릎 위에 랩톱을 올려두고 이런저런 복지센터 탭을 띄워놓은 채 고민에 잠기곤 했다. 말은 안 했어도 저번 여행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본인도 부정할 수 없었다.
에스텔의 스케치북은 거실 책장에 먼지 하나 안 닿게 보관되어 있었다. 실버는 매일 오전 에스텔이 작업을 하러 떠나면 그 스케치를 되새겨보았다. 남들이 모르는 나, 나조차 알 수 없는 고통을 에스텔이 그대로 고아준 듯해 그림을 쓰다듬으며 손가락에 탄 자국을 묻혔다. 스케치가 상할까 만지는 건 그만두긴 했지만, 혹시 연인이 잊어버릴까 봐(에스텔은 자신의 그림이 얼마나 값진지 모르는 눈치이므로) 늘 책장을 관리한다는 표를 냈다. 잡지나 여타 소설책은 하나도 들춰보지 않았으면서.
그는 시를 읽는 취미가 생겼다. 지나치게 정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활자 몇 줄을 눈에 넣기가 어려웠던 그로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취향을 따지고 글줄을 논할 기력이 생겼다면, 실버는 이 힘이 마땅히 에스텔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민한 결과가 오늘 준비할 소박한 만찬이었다. 실버는 에스텔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창가에서 지켜보다가 천천히 코트를 꿰어 입었다.
말마따나 혹독한 날씨였다.
식료품점이 문을 닫기까지 시간이 있어 가는 길에 커피를 주문했다. 목소리를 꺼낼 때 조금 머뭇거리긴 했지만, 전처럼 사람과 대화를 못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아주 잠시간의 호전이더라도 실버는 이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싶었다.
장을 보는 것도 평범했다. 다만 식자재를 에스텔보다 꼼꼼하게 고르고, 무게에 따라 가격이 다른 채소류는 몇 번이고 비교해 적정량을 구매하고, 통조림이나 냉동 과육 대신 생과일을 카트에 담는다는 게 달랐다. 에스텔이 좋아하던 찻잎은 동이 나 카페인이 없는 티백을 집었다. 계산한 뒤에는 카운터에 맡겨두었던 커피를 마시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의 얼굴이 굳은 건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 어귀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 때부터였다. 실버는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여긴 가난한 대학생들이 주로 거주하는 세 놓은 주택가였다. 말싸움이 벌어질 일은 별로 없었다. 눈 때문에 사고가 났다면 구급차가 왔을 텐데, 대신 속도를 늦추어 슬슬 진입하는 경찰차가 보였다. 실버는 눈길에서 걸음을 빨리했다. 닳고 닳은 신발 밑창이 몇 번이나 미끄러지는데 거의 뜀박질에 가깝게 걸었다.
방향은 그들의 집이었다. 혹시 모르지만.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 조급함을 부채질했다. 잠깐 새에 강도가 들거나, 평소처럼 뭔가를 깜빡한 에스텔이 잠시 집에 들렀다면. 실버는 흘깃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겨우 한 시간가량이 지났을 뿐이었다. 에스텔은 작업실에 가 있겠지. 그가 종이컵을 내동댕이치고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려고 할 때였다.
“실버!”
에스텔이 외쳤다. 그 옆에서 경찰관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실버는 엎지른 커피 웅덩이 위로 장바구니를 떨어뜨렸다.
“에스텔?”
“어, 어디 갔었어?”
“잠깐 장을 보러… 그런데 왜 여기… 무슨 일 있어?”
“네가 없어졌어!”
에스텔의 눈가가 발갰다. 물기가 보이지는 않았는데, 실버가 손을 뻗자마자 품에 와락 달려들어 울음을 터뜨렸다. 실버는 멍하니 경찰관의 질문에 답변했다. 예, 잠시 장을 보러. 두 블록 거리에 있는 식료품점에. 아니요. 네, 맞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울음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이닥쳤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분명 모든 게 괜찮았는데. 날씨가 험할 뿐 그럭저럭 일상을 영위하던 그들이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굳은 머리로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몽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그의 눈에는 흐느끼는 에스텔의 작은 머리통이 보였다.
네가 없어졌어. 사라졌었어. 결국 실버 때문이었다. 멍청한 실버, 들떠서는 홀로 평안한 일상에 몸을 기댄 실버. 그게 연인을 고립시키는 줄도 모르고.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몇 번의 질문 끝에 신원을 확인한 경찰관은 차에 올라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이라 보지는 않았지만, 신고한 사람이 워낙 절박하고, 사라진 사람이 환자인 모양이라 확인차 출동한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먼 거리가 아니었으니 바로 옆집에 물어봤어도 금세 종료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에스텔이 울었는데. 정식으로 접수되지도 않을 가벼운 촌극이라 넘기기에는 너무 큰 대가였다. 경찰관은 웃지도 무심하지도 않았으나 실버의 의식에 들어올 만큼 명징하지도 못했다. 그에게는 오로지 일그러진 연인의 표정만이 눈동자에 박혔다. 그는 추운 거리에서 에스텔을 오랫동안 끌어안아 주다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슬펐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겨우 에스텔을 집으로 데려간 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으면서 그는 마른 얼굴을 훔쳐냈다.
그 자신도 아직 몸이 차가웠다. 외투를 벗을 정신이 없었던 터라 물이 차오르는 동안 울코트에 수증기가 맺혔다. 몸은 식어 빠진 채인데 몹시 갑갑하고 무더웠다.
에스텔은 부은 눈으로, 작업실 열쇠를 들고 나가지 않아 바로 돌아왔다고 했다. 네 얼굴 보고 다시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골목길에는 지나는 사람이 없었고, 날은 춥고, 급기야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너는 오지 않았다고. 잠시 산책하러 나갔다면 날씨가 궂어 돌아와야 할 텐데.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다시는 오지 않을 생각으로, 아무런 짐도 없이, 그저 가버린 거면 어쩌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화를 들고 있었다고 했다. 경찰이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할 수도 없었다. 실버는, 아마 그들이 신체적인 문제가 없는 성인 남성보다는 서럽게 떨며 말도 하지 못하는 이 소녀 때문에 찾아왔으리라 생각했다. 누구도 아닌 그녀의 연인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를 동정하도록 만들었다.
욕조에 물이 차올랐다. 그는 거기에 그냥 머리를 박고 싶었다. 겨우 참고 거실로 나가자, 에스텔은 담요를 떨어뜨린 채 소파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기운을 소진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차마 내뱉지도 못할 욕설을 삼키면서, 다정한 손길로 동그만 어깨에 담요를 끌어 올려 주었다. 그는 실버 그레타가 아니었다. 에스텔의 실버, 늘 곁에 있고 단정한 태도로 대화를 귀담아듣는 실버, 책장에 쌓인 먼지를 터는 실버, 아침마다 멍한 표정으로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곤 하는 애처로운 연인 실버였다. 그 사실을 잊다니. 다 잊고서, 혼자 편안하게 저녁 식사 생각이나 하다니.
그는 쿠션이 기울지 않도록 소파 팔걸이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까지 가슴이 쿵쿵 뛰고 머리에 피가 돌지 않는데, 놀랍도록, 이 어리석은 영혼을 찢어발겨 벌주고 싶도록 살고만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에스텔이 슬퍼할 테니까.
이제 에스텔은 어떤 절망도 더 견디지 못하리라. 그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으므로.
계절이 바뀌기 전 마지막 한파가 불어닥치고 있었다. 아침에 무심코 켜둔 라디오에서 동파와 동상에 주의하라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버는 일어나 라디오를 끈 후에야 자신이 일어서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는 마치 짓다 만 집처럼 손이 시려오는 거실을 돌아보았다.
좁은 집 안에, 온 삶을 다한 것 같은 거대한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