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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조난) 커미션입니다~
소란스럽게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말갰다.
"귀찮아. 누르면 찻물이 나오는 기계가 필요해."
"내가 있잖아."
"그런 거야?"
"기계보다야 사람이 낫지 않아?"
대답하며, 크릿이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병 주둥이에서 투명한 김이 폴폴 흘러나왔다. 가방에 달랑달랑 매달고 다니던 한 쌍의 여행용 스테인리스 컵이 제 몫을 해냈다. 테베는 딱 맞는 온도로 따스한 커피잔을 받아들 수 있었다. 비스킷을 담아 먹을 간이 소서까지 있었다.
테베는 배가 고프다며, 자신의 적은 짐을 뒤져선 단단한 햄과 마른 과자를 꺼내 담았다. 포장지마저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에 들어 있었는지 의심이 되는 대목이었다.
크릿은 군말 없이 나이프로 햄을 잘라 주었고, 사과를 깎듯이 하는 그 모습에 테베가 소리 내어 웃었다.
“정글 나이프? 그런 걸 갖고 다녀?”
“……장소가 장소니까.”
이곳은 정글이었다.
아니, 열대기후라기엔 일반적인 숲의 습한 정도고, 열대과일이 주렁주렁 열려 있거나 초록색 뱀이 발목을 타오르지는 않았으며, 적당히 따스한 나무군락에 더 가깝긴 했으나 과장 좀 보태면 정글 같기는 했다. 태평한 얼굴로 비스킷을 베어 먹는 테베를 크릿은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잦았던 걸까? 기분이 옮았는지 지나치게 평온한 분위기였다.
어쨌거나 크릿은 햄을 잘 먹었고, 테베는 만족했다.
둘은 차와 간식을 조금씩(크릿의 ‘조금’은 테베 양의 두 배긴 했으나) 먹어 치우고 약속한 것처럼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피어오르던 연기가 잦아든 듯도 했다.
좀 떨어진 곳, 그러니까 나뭇가지들이 우수수 엉켜 있고 관목이 저들끼리 얽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착륙한 전용기가 있었다. 가이드도 없이 단둘과 조종사 하나가 탑승했는데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며 완전히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무전은 무사하고 통화권 이탈 지역이 아니니 어떻게든 되리라는 심정이었다. 크릿은 테베가 말짱하니 괜찮다, 판단했고.
이제 슬슬 연락해 볼까, 하며 테베가 돗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을 터는 품은 여전히 느긋하고 명랑했다. 크릿은 짐을 챙겨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테베가 조종석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추락한 비행체는 폭발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났으니 무사하리라.
하지만 이 태연함은 조종석에서 빠져나온 테베가 총총총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것에 흔들리고 말았다.
“테베, 어디 가?”
“응, 두어 시간 기다리라는데, 여긴 시야 확보가 안 되니까 사막 쪽으로 나오래.”
“사막?”
“있나 봐.”
그렇게 말한다면 믿어야지 어쩌겠는가. 크릿은 모래 섞인 흙에 발자국 패이지도 않을 만큼 가벼운 사내를 뒤쫓으며 일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지 짚어보기 시작했다.
테베는 화산에 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간 많은 곳을 두루 다녔지만, 그중엔 물론 화산이 떡하니 자리 잡은 작은 섬마을도 있었지만 ‘화산’ 자체에는 올라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활화산이 좋지 않으냐 덧붙였다.
“진심이야?”
크릿은 제 발로 사지에 걸어가겠다는, 그것도 지옥불 연상케 하는 마그마가 달갑다는 이 친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난감했다.
고민은 곧 끝났다. 늘 그렇듯 크릿은 테베의 고집을 꺾으려는 노력을 깔끔하게 접고 그나마 안전한(?) 활화산 지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왕 들어주는 김에 최선을 시도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 는 것이 크릿의 의견이었고 물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도 효율적인 전략인데, 테베는 자신이 분명하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영 시큰둥해 의욕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여행사에서 가이드를 찾고 비행기 탑승 수속을 밟는 데까진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순조로웠다. 도착한 약속 장소에서 전용기 이륙이 늦어진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진 말이다.
점검 중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그들은 일정 중 떠버린 네 시간 가량을 최대한 즐겁게 보내기로 하고, 우선 주린 배를 채우러 카페테리아에 들어섰다. 크릿은 낯선 이국의 소음 속 테베가 자연스레 섞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새삼스레 놀랐다. 게다가 메뉴판을 슬쩍 읽고 직원과 하는 대화가 꽤 그럴듯한 구사처럼 들렸다.
“이쪽 말 알아?”
테베는 말 대신 안내 책자를 들어 올렸다.
“근처에 와본 적도 있거든. 사투리 격이지 뭐.”
듣기는 둘째치고 가이드북만 보고도 말하는 게 가능은 하냐는 의문 속에서 크릿은 잠잠해졌다. 언제나 그렇지만 테베에 관해 감히 추측하는 건 무의미한 힘쓰기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많더니 테베가 고른 건 치즈버거와 새우볶음, 콥샐러드, 홍차 두 잔이었다. 차에서 아몬드와 시나몬 향이 강하게 느껴지고 빛깔도 다소 탁한 것이 이 지방 방식대로 끓인 듯했다.
다른 음식은 별다른 조미료 없이 단순하고 기름진 맛이었다. 테베는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도 그곳의 특수한 문화라든가 향토 음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크릿이 먹던 걸 꿀꺽 삼키고 물었다.
“향신료를 잘 못 먹는 거야?”
“갑자기? 아니. 먹기 편한 게 좋은 것뿐이야. 그리고 먹는 건 언제든 와서 시도해 볼 수 있잖아, 이민자들이 차린 가게도 많고.”
생각보다 더 단순한 이유였다.
크릿이 보통 크기의 버거를 한 손에 꼭 쥐고, 한 번에 반쯤 베어 물어 작살 내는 걸 보던 테베가 종업원을 불러 메뉴 하나를 더 골랐다.
“근데 왜?”
“잘 못 먹는 것 같아서.”
“괜찮아~ 이것만 해도 움직이는 데에 문제는 없어.”
크릿은 여전히 우물우물하며 우직하게 끄덕거렸다. 테베는 무심코 쥐고 있던 샐러드 포크를 내려놓고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그 시선이 어쩐지, 부모들의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같아 크릿은 새우 접시를 건드려도 되는지 아닌지 잠시 아리송해졌다. 결국 그는 앞접시에 새우를 잔뜩 덜어 테베 앞에 건네주었다.
어쨌거나 음식은 먹을 만했고, 차는 끝내줬다. 한결 따끈따끈해진 둘은 밖으로 나와, 걸어서 십 분 거리의 시장에 들르기로 했다. 타국의 시장 구경은 시간 죽이기에 가장 알맞은 행위가 아닌가. 그리고 크릿은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크릿의 걸음으로는 금세 도착했겠지만, 테베는 여행자보다는 이곳 주민처럼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뜯어보았다. 그다지 흥미가 갈 만한 곳 없는 골목 언저리나 주차장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난 풀꽃 같은 데에.
크릿은 그런 테베를 보는 게 좋았다. 테베는 정착하지 않는 게 아니라, 언제나 무척 많은 장소에, 모든 영혼에 손을 담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생각이 들면 자신의 가슴에 들어온 가느다란 손가락을 생각하고는, 살랑살랑 눈이 내리는 툰드라 축축한 대지 위에 선 듯 울렁거리게 되는 것이다.
테베가 멍하니 상념에 잠긴 크릿의 손을 끌었다. 크릿은 인파를 헤치며 나아가는 그에게 끌려 연신 죄송합니다, 하며 시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전이었지만 나름 관광지인 탓에 사람이 많았고, 점심과 저녁거리를 구매하러 온 노인들이 흥정하는 것처럼 손짓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딘가 유영하는 것만 같은 테베와의 여행에서 갑작스럽게 보편적인 삶의 한복판으로 내던져진 크릿은 얼마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고개를 젓고 테베를 똑바로 본다, 고 생각했을 때, 테베는 노점에서 스카프를 고르고 있었다. 크릿은 그 중 눈에 띄는 희고 하늘거리는 레이스를 보고, 다가가서 테베의 어깨에 대주었다.
“이런 게 어울려?”
하고 테베는 웃었다. 손으로 짰는지 섬세하고 질겨 보이는 이 직물은 그에게 무척이나 어울렸는데, 크릿은 그런 말을 하려다가 그저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는 옆 좌판으로 가서 장신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테베가 졸랑졸랑 따라와 같이 기웃거렸다.
은과 주석으로 만든 반지, 목걸이, 귀걸이와 발찌 같은 물건들이 오전의 이른 햇살 아래에서 투박하게나마 빛을 뿜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어른거리는 레이스의 환영에 반쯤 홀려 있던 크릿이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햇살이, 열 오른손처럼 목덜미를 데웠다.
테베가 말했다.
“크릿, 이 주변은 사막화가 되고 있대.”
“…사막?”
“그래. 난 그런 사막에 다녀온 적이 있어. 사막이라기보다는 불에 탄 숲 같았지, 적응하지 못한 풀들이 다 메말라 있었고 모래는 간혹 검었거든.”
“얼룩말처럼?”
“구름이 버린 그림자처럼.”
그러고서 또 다른 상점으로 가버렸다. 구경이라기보다는 그저 여기저기 들러보는 사람처럼, 하지만 절대로 과일을 찌르거나 상인에게 말을 걸 것처럼 굴진 않았다. 좌판을 벌인 상인들도 낯선 얼굴인 테베를 조금 눈여겨볼 뿐 관광객에게 굴 듯 호객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마을에서 잠깐 온, 다음에도 볼 사람을 대하듯이.
크릿은 자신 앞에 있는, 찰흙을 주물러 만든 듯 미끈하고 두꺼운 은 조각들을 계속해서 보았다. 테베가 돌아올 때까지.
빛이 이만 물러나 다른 누구 아닌 하늘 자신을 위해 박애하러 갈 때까지.
떠올려보면 기이한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크릿은 생각했다. 대체 뭐가 문제였지.
아무것도 문제 될 소지가 없었다면, 그저 일어나야만 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크릿은 마음을 쉽게 먹기로 하고는 작은 관목을 훌쩍 뛰어넘어 쏠랑 가버리는 테베를 곧장 따라잡았다.
시야가 확 트이며, 여기 모래 바다가 있었다.
“테베, 여기가 그 사막이야?”
“응? 무슨 사막?”
“사막화되고 있다는, 구름이 그림자 놓고 간…….”
“글쎄, 지도를 안 봐서 모르겠지만 여긴 아닌 것 같아. 구릉이 이렇게 낮지 않았어.”
어쨌든 나가 볼까, 하며 테베가 발을 내디디는데 크릿이 한 걸음 먼저 앞질러 갔다. 잠깐만, 하고 그가 말했다.
“물소리가 들려.”
“물이라니. 수맥 있나? 귀가 좋네~”
“아니, 파도 소리 말이야. 바다.”
크릿은 조금 전에 모래 바다, 라고 연상한 이유를 깨달았다. 정말로 바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빙산이 내려앉는 거음이나 해빙끼리 부딪쳐 가루 같은 물보라 날리는 언 해상의 기운은 아니었지만, 분명 가까이에서 그런 노랫소리가 들렸다. 테베는 같이 귀를 기울였다.
“잘 모르겠어. 숲에서 잔가지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는데….”
테베는 턱을 쓰다듬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등산화를 신은 발에 모래 패는 정도가 점점 깊어졌다. 순식간에 흙이 말라붙는 구간인 모양이었다. 크릿은 바로 전까지 앉아있었던 숲에도 흰 자갈 파편 같은 게 섞여 있던 걸 기억해냈다. 열매 껍데기인가 싶었건만.
테베가 벌써 저 앞에 가 있었다. 시야 반절 즈음 차오른, 바람에 연신 녹아내리는 황금 구릉 위에 선 테베가 두 팔을 쫙 펴고 이쪽으로 돌아섰다.
“크릿!”
“응?”
“와 봐!”
높은 곳에선 하늬바람이 부는지 테베의 부산한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크릿이 테베의 발자국 옆에 더 깊은 자욱을 남기며 언덕 위를 올랐다. 발을 빨아들이는 모래는 얼마간의 습기를 안고 있었다.
“여기, 해변이었나 봐.”
테베가 말했다. 크릿은 후드를 벗고, 고개를 찬찬히 움직여가며 탁 트인 시야를 눈에 담았다.
파르스름하게 발광하는 수평선이었다. 곶이나 만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지형인데, 그건 단지 망망대해까지 뻗어 있을 듯 끝없이 하늘을 향해 맞붙고 있었다. 찬란한 대낮의 볕이 잔물결에 산란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언덕 아래로 모랫바닥은 주름지며 뻗어 있었고, 중간엔 나지막한 사구가 가까운 해변을 보는 걸 막고 있어서 그저 사막에 바다를 댄 야릇한 풍경이었다.
마지막으로 크릿은 테베를 보았다.
테베의 눈동자에서 수평선은 빛이 아닌 불로 변모해, 반뜩한 구슬 같은 검정 안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크릿은 잠시 그 눈에 매료되어 있다가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오자 정신을 차렸다.
“크릿! 저기 배가 있어.”
“…주변에 사람이 사나 봐.”
“그런가. 타자.”
응?
거부할 새가 없었다. 어떻게 본 건지도 모르겠지만, 테베는 이미 배가 있다는 해변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크릿은 자신을 포함한 인류는 그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저 이의 발자국을 따르지 않을 방도가 없다는 걸 알았다.
놀랍게도 해변에는 썩어가는 나루터가 닿아 있고 정말 조각배가 걸치어 있었다. 크릿이 확인한바 물 새는 곳도 없고 양쪽에 노를 댄, 선두와 선미가 훌륭한 (그러므로 어떤 어부가 쓰는 것이 분명한) 작은 나무배였다.
물론 테베는 감정 결과를 듣지 않고 미리 올라타 있었다. 크릿은 물살과 풍향을 가늠해보다가 함께 올라탔다. 크릿의 무게에 배가 약간 기우뚱했으나 기특하게도 곧잘 중심이 잡혔다. 크릿은 노를 쥐었다.
낯선 타국에서 익숙한 물건이 손에 감기자 꿈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명료해졌다.
둘은 나른한 오후에 호수에 돛단배를 띄운 소년들처럼 즐거운 얼굴로 출항했다. 바닷물로 산책을 나오다니 정신 나간 짓이지만, 어쩌겠는가. 날씨가 좋았고, 바닷바람 부는 이곳과 달리 숲은 무더웠으며, 사막과 잇닿아 있는 바다란 것은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데가 있었으니.
동쪽에 앉은 크릿의 이마를 태양이 만지고 지나갈 때, 그들은 해변에서 퍽 길게 순항했다는 걸 깨달았다. 해변인지 사막인지 모를 곳이었으므로 둘 사이에는 이런저런 추측이 오갔다. ‘지도에서 본 적 없다’는 것을 보아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지역은 아닌 모양이었다. 크릿은 잠시 이곳이 배를 띄우면 안 되는 장소가 아닌지 고민했으나 이미 멀리 와버린 터였다.
크릿은 어느 순간 자기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느꼈다. 벌써 해가 지나? 그러나 해는 크릿의 눈앞에 멀쩡히 떠 있었다. 그는 문득 테베가 묘하게 웃는 걸 눈치챘다.
크릿은 노를 쥔 채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웠다. 무지 어두웠다. 그들은 굴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테베?”
“응?”
“바다에서 하면 안 되는 게 몇 개 있거든.”
“있겠지. 그중 서너 개는 나도 알아.”
“그럼, 해저 동굴 괴담도 알아?”
“괴담 아니지 않나, 그거.”
알고 있잖아……. 그러고 보니 언젠가 말해준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져가는 오후에 바닷굴 안으로 들어간다는 건 거의 자살 시도였다. 크릿은 열심히 선두 방향을 꺾으려고 노력했으나 이건 나룻배일 뿐 돛이나 닻이 존재하는 범선이 아니었다. 테베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크릿은 방향을 돌리기 위해 뱃전을 굴의 한쪽에 붙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동안 테베는 몸을 뒤로 뉘여 동굴의 천장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두는 방향이 달랐기에, 크릿은 테베의 눈 안에 담긴 빛무리가 그저 안광이 아니라는 걸 간과하고 말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물살에 휩쓸렸다. 크릿이 다급히 테베를 품에 가두고 후미에 고정했다. 나룻배가 빙글빙글 돌며 속절없이 급류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크릿은 먼저 빠져나가 테베를 물속에서 끌어 올렸다. 그들은 나란히 겉옷을 쥐어짜고, 속에 입은 것을 벗었다. 방수 배낭을 가져온 게 다행이었다. 크릿이 제일 덜 젖은 옷가지를 추려내는 동안 테베는 가늘게 떨었다. 그러면서도 동굴의 천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테베가 말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그러면 정말 조난당할지도 몰라. 테베, 휴대폰 터져?”
“아니, 왜냐면.”
테베는 마른 천 옷을 받아 들면서 손가락을 내뻗어 자신이 줄곧 보고 있던 것을 가리켰다. 동굴이었다. 캄캄하지만은 않고, 목소리가 낭낭하게 울릴 만큼 속이 컸다. 마치 뉘인 항아리 안에 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곳은…
동굴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달빛이 곧잘 스며드는 여느 사막의 모래 굴처럼. 검은 돌로 지어진 이곳은 거칠거칠하고 암석끼리 덩어리져 있었으나, 그런 돌 중에서 석영 혹은 정체 모를 빛깔이 요사스러운 보석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 천정이며 사방 벽에 박힌 가느다란 모양의 보석들은 말간 하늘을 내리꽂는 것 마냥 푸르스름한 빛을 내리고 있었는데, 모습이 동양 전설 속 내려오는 야명주를 연상케 했다.
테베가 크릿의 품에 파고들며 말했다.
“해가 지기 전에 봐야 해. 태양이 아니라면 빛나지 못하는 것들이니까.”
“저게 뭐야?”
“보시는 대로.”
테베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바지런하게 마른 옷을 껴입더니, 여전히 얼이 좀 나가 있는 크릿을 바위에 앉히고, 캠핑용 부싯돌로 등잔에 불을 붙였다.
얼마간 온화한 열과 빛이 퍼졌다. 저 아름답고 냉한, 해를 삼키는 것들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크릿과 테베는 차가운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잔잔한 물살이 파랗게 지는 투광을 쪼이느라, 언뜻 드러나는 손등처럼, 희고 파리하게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앞에 둔 기름 등잔이 석연치 않게 타고 있어 무릎께만 점점 따스해졌다.
크릿은 테베에게 이걸 알고 있었냐고 물었다. 테베는 고개를 젓고는 그저, 먼 앞에서 무언가 반짝였는데 그게 껴안고 싶을 만치 아름다웠다고 답했다.
이런 물속에는 바다눈이 내리지 않겠지. 크릿이 말했다. 테베가 물었다. 심해로 떨어지는 사체들 말야?
“응, 이런 동굴은… 아주 깊은 바닷속까지 혓바닥을 숨기지 않는 이상은, 눈멀고 배부른 미생물들이 살 테니까.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살지 않거나.”
“그건 불가능해. 바다인걸.”
“가능해. 바다니까.”
테베가 크릿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무척 가볍고 동그란 느낌이 전해져 크릿은 그를 끌어안고 싶어졌다. 몸을 동그랗게 만 테베는 웅얼거렸다. 급류에 휩쓸리고 나니 힘이 빠져 졸려오는 듯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게 로맨틱 클리셰지.”
“그래?”
“이 수몰된 동굴 밑바닥엔 어떤 죽은 것도 가라앉지 않는 거… 그런데 물길 위로는 햇살의 시체가 뿌려지고 있는 것.”
“테베.”
“응.”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언제나 그러고 있는걸.”
“그거, 나랑 같이하자.”
“언제나 어디로든 휙 가버리는 걸?”
“그래.”
테베가 웃으며, 싫어, 라고 답했다. 크릿은 몸을 그쪽으로 조금 더 기울여 그가 편하게 기대도록 했다.
“넌 언제나 거기에 있어. 날숨이 되는 건 나일 테니까.”
“왜?”
“견딜 수 없어서.”
무엇을, 이라고 크릿은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해변에는 석양이 지는 모양이었다. 둘은 함께 환란한 호박색으로 불타는 수평선을 상상했다. 왜냐하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줄기들이 금빛으로 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릿은 잠시나마 버거운 행운을 느꼈다. 테베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고, 자신은 곁에서 한쪽 몸을 내어주고 있다는 게.
아무도 모르는, 장작에 불을 때기도 힘든 수중 굴 잇몸에 앉아 형태 불투명한 볕 길이 유성의 궤적처럼 밝아지는 걸 보면서도 안락한 기쁨을 느꼈다.
“크릿. 내가 거절해서 싫어?”
“아니. 어울리는 날씨잖아.”
그래서 좋아. 크릿은 눈을 감은 테베 대신 발갛게 눈시울 붉히는 바다의. 해일의 안쪽을 지켜보았다.
아, 신호 터진다. 꿈질거리던 테베가 말했다.
조난자들은 구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