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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ㅈ님 - 사랑(독)

나사르 본주 2019. 2. 23. 21:08




사람 먹는 여우는 희다.

 

이 이야기가 도는 건, 가끔 제릉에 서린다는 도깨비불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 먹는 여우는 진실로 희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단숨에 태워버리는 시허연 눈깔을 하고서 여럿 달린 꼬리를 비질하듯 휘두른다고 한다. 마을 하나가 온통 타버리는 일은 전부 그 여우가 저지르는 장난질이다.

이런 요요한 이야기를 흔히 들어왔다. 밤에 거리를 나다니면 그가 널 찢어 죽일 거다, 어둑서니가 널 그치에게 끌고 갈 거다, 너 하나 죽는 데서 안 끝나 이 마을이 다 타버릴 테다. 하여 밤길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살았다. 흰여우가 무서워서.

그러나 이제 나는 백설만 웃자란 길 끝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주지 않았다면, 그나마 달길의 미진한 경계조차 없었다면 곧장 달려가 그 앞에 엎어졌을 것이다. 와룡이 일어서면 장엄한 자태에 그저 주저앉을 짓밖엔 못 하듯이.

은나무처럼 흰 목덜미가, 죽음같이 아름다웠다. 불꽃은 소리가 없으니까. 미처 입을 열 새 없는 적막 속에서 너울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칼바람이 지나고 나서도 그는 설기떡 같은 고운 눈 우에 발을 가만 얹고 있었다. 그러자 자그만 별채 몇만 놓인 후원이 마치 종묘 어도처럼 상서로워졌다. 상제만이 다니는 그 길은 볼 때마다 닿는 이를 태울 것만 같았는데, 가느단 사슴처럼 우아한 발짓에는 불경을 범하지 못한단 듯 가만히 눕기만 했다. 나는 왕이 밟는 땅이라면 이래야만 한다고, 실로 맘먹고 말았다. 누군가 이 생각을 들을까 두려웠다. 목을 친대도 실수였다 빌지는 못할 테니.

소복하게 반짝이는 눈길은 결바람에 챙을 세워 피를 낼만큼 날카로웠다. 저 창백한 발등이 다칠까 마음이 탔다. 하지만 인간 아닌 것이 피를 내지 않는 것처럼, 그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눈밭을 꾹 눌러 발자욱을 남겼다. 눈 패인 땅을 보며 나는 별똥이 떨어진 자리 같다고만 느꼈다. 사람이 저럴 수는 없는 것이니까, 머얼리서 상제를 뫼실 때조차 이만한 긴장은 없었으니까. 차라리 공포라고 해야 좋겠다. 마시면 죽는 약을 제 밥그릇에 떨어뜨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미음을 떠먹겠지. 죽는단 걸 알고서도.

사람 먹는 여우는 희다.

 

아주 어린 시절에, 몸이 내 몸이고 병아리가 닭이 된단 걸 모를 때에 화로에 뺨을 덴 적이 있다. 나는 뜨듯한 찻물보다 차디찬 불을 먼저 배웠다. 엄니 불이 차요, 하니 눈발보다 허예진 얼굴로 물을 가져와 끼얹으셨다. 물이 닿자 그제야 얼굴이 타드는 듯 뜨겁고 아팠다.

그 새하얀 불처럼. 그때 죽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지금껏 생각해왔다. 앞으로 영영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던 말은 다 거짓이며 흉한 얼굴로 들게 된 시중은 상제의 손녀딸이 기르는 개보다 못한 신세다. 그때 하얗게 전소해버렸다면 이처럼 살진 않았을 텐데, 여겨왔다.

당신을 위해 이리 살아온 것이다. 생애 단 한 번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면, 그게 당신이었다.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 느낄 수 있도록 나는 추한 삶을 누려온 것이다. 아니라면 이 목숨에 더는 의미가 없다. 짙은 밤중에 금칙을 어기고 나온 것, 있어선 안 될 발자국을 따른 것, 덤불로 몸을 가려 당신을 훔쳐본 것이 전부 운명이라면, 이 새카만 재의 소생도 뿌듯한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이 희망이 종래엔 독초로 자란대도 좋다. 기꺼이 뜯어 삼키겠다. 그때에는 당신이, 당신만은 내게, 저 흰 손을 내밀어 주었으면. 손톱 끝에 입 맞추고, 떨리는 손으로 너울을 들어그 얼굴을 한 번만, 다시……. 당신이 내 삶 정히 하얀 불이도록.

 

꽃이도록.

 

발가락이 뜨거워 고개를 내리니 등불을 떨어뜨리고 만 것이 보였다. 침이 넘어갔다. 맑고 차가운 쌀죽을 삼킨 것 같았다. 잡풀을 씹을 수 없어서 미음만 넘기던 나이는 지나고도 한참인데, 다시 어려져 처음부터 자라는 기분이었다. 다 크려면 이 그릇을 비워야지. 뭐가 들었는진 생각지 말렴. 천천히 넘기고 아랫목에 뉘면 된단다, 독기가 온몸에 퍼지도록. 눈이 마주쳤다. 눈이 녹고 있었다.

내일 물집 잡혀 부풀 상처는 둘째치고, 겁을 한가득 집어먹고 말았다. 꽃전을 삼키다 목이 막힌 듯이 입을 벙긋거렸다. 이름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겁이 났다. 이 얼굴을 보시면 어쩌지. 마음에 안 들어 죽이겠다고 하면 어쩌지. 정녕 그렇게 말씀하셔도 난 못 피할 텐데뭐든 거뜬히 좋다고만 하게 될 텐데.

다시 드러난 얼굴은 달빛이 서려 반듯하게 빛났다. 같은 눈꺼풀에 달린 같은 눈썹털인데 저것은 백찻잎에 송송 난 흰 솜털처럼 예뻤다. 나는 상종할 수 없는 이였다. 그래서 도망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명한 기억이지만.

 

아침 녘, 고루한 여우 얘기를 지껄이던 동무, 그 애가 안목에 앉겠다며 내 이불을 들춰보고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발등에 사마귀 집처럼 화상이 잡혀 보기가 참 흉했다.

 

먹혀버린 사람은 어떻게 됐대?”

 

내가 물었다. 새벽빛이 가시고 구멍 난 창호 안으로 막 쌀알 같은 볕이 들어섰는데, 흰빛을 보고는 오늘 당신이 녹아지실까 걱정부터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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