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작가님의 '파과' 2차창작, 조각과 투우입니다! '적당히 겉멋 든 음식점에서 스테이크를 썰어 먹는' 장면 의뢰로 구운 문어다리를 올린 녹두수프, 서양란을 장식한 스테이크, 분홍색 크림을 칠하고 절인 체리를 올린 미국 가정식 케이크, 아포가토와 오렌지 아메리카노를 먹였어요!
남자는 서슴거리지 않고 즉시 나이프를 들었다. 그가 포크로 고깃덩이를 꾹 누르자 육질에서 멀건 핏물이 배어 나왔다. 퍽 질겨 보이는데도 무딘 칼이 쉽게 들었다. 아니면 단지 남자의 팔심이 대단한 것일 수도 있겠다. 주문할 때 뭐라 덧붙이더니만 그의 몫으로 나온 접시에는 거의 날것에 가까운 요리가 담겨 있었고 조각은 태우다시피 익힌 채소와 토치로 겉만 지진 듯한 육고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 살이 잘리는 걸 보는 무감한 시선으로 멀거니 보고 있자 남자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아니…. 사실 요리의 생김새보다는 저 뻔뻔한 낯짝이 싫은 것일지도 모르지. 녀석과 마주 앉아 식성을 알게 된 데에 대한 반감이라던가.
투우가 물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다 먹기에는 많아.”
조각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앞에는 전채요리로 나온 녹두 수프가 놓여 있었다. 웨이터가 치워드릴까요, 할 때 단호하게 거절한 걸 보면 마저 먹을 셈이었다. 덕분에 본 요리인 스테이크가 식어가고 있었다. 투우는 그 미련함에 혀를 찼다.
“일하려면 많이 들어야지.”
“시킨 게 이게 다는 아닐 거 아냐.”
“코스잖아, 코스요리. 남이 내준다는데 뭘 걱정해?”
“많다니까는.”
조각은 수프 그릇에 몇 번 수저질하다가 관두고 한숨을 쉬었다. 전채요리 위에 얹혀있던 구운 낙지다리를 오래 씹었더니 턱이 아팠다. 저 버릇없는 애새끼는 노화된 몸의 사정도 모르고 먹는 걸 구경하며 식탁에 팔꿈치를 올렸다. 저급하지 않은 식당에서 성큼성큼 주문하거나 나이프와 물잔의 위치를 지키는 것과 비교하면 제멋대로인 예법이었다. 투우 녀석은 언제나 제멋대로이긴 했으나.
식욕이 식어버린 걸 감추잖고 앉아만 있자 투우가 전체 요리접시를 빼앗아 창턱에 걸쳐 놓았다. 그가 혀를 내어 핥는 입술이 피와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먹기나 해.”
투우가 툭 뱉었다. 조각은 한심하단 듯 그를 노려보다가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가까이 가져왔다. 휴양지 식당처럼 점점이 찍어낸 소스 곁에 보랏빛 꽃 모가지를 분질러 장식해 두었는데, 가만 보니 서양란이었다. 양식당이 익숙하지 않아도 이게 우스운 조합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조각이 피식거리자 투우가 손깍지 낀 제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시선을 치웠다. 비웃음을 참는 기색이며 답지 않게 그걸 숨기려고 한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조각이 말을 건넸다. 상대를 파악했기에 외려 누그러진 투였다.
“일하러 왔나?”
투우가 바글바글한 식당 내부를 바삐 휘젓는 웨이터 한 명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표적인가 싶었다. 그런데 일을 하러 와서 이렇게 느긋이 구나. 이렇게까지 방심하는 애였던가….
“아니, 일하면서 이러면 쓰나? 놀러 온 거야.”
“나는 왜 불러 갖곤.”
투우가 조각을 포크로 가리켰다.
“거기 있었잖아.”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었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조각은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다. 물론 투우 녀석 낯짝을 보러 올 생각은 아녔고 오래전부터 이 방역업체에 일을 맡겨온 사장이 계열사 창립기념일 행사를 연다며 뷔페 입장권을 전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그것도 많이, 살인을 청부해왔다는 걸 이런 식으로 짚고 넘어가는 데에 냉소하면서도 사람을 죽이며 한껏 부강해진 회사에 묘한 관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말하자면 같이 커온 건물이고…. 게다가 해우는 초대장을 든 게 당신 정도여야 안면이 산다며 징징거리기도 했다. 몰랐는데 청부업에도 낯짝이 생긴 모양이었다. 새삼스러운 기분전환이었는데 인간들은 여전했고, 식당은 나름대로 근사했으며 쓰잘데없이 규모가 컸다.
말을 똑바로 하자. 없어야 할 곳에, 그러니까 ‘거기에’ 투우가 있었던 것이다. 조각은 장소에 맞게 걸친 번듯한 옷과 분칠한 얼굴이 문득 경멸스러워졌다. 젊은 사업가 행세를 하고 있었는지 투우의 정장은 평소보다 세련되고 질감이 좋아 보였다.
향기도 났다. 입맛을 떨구는 산고사리 향기. 조각은 향수를 씹는지 고기를 씹는지 모를 기분으로 투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놓던 투우가 눈이 마주치자 놀라며 웃었다. 결국 조각이 포크를 내려놓고 주황색 빨대를 꽂아놓은 칵테일 잔을 들어 쭉 빨아들였다. 지독하게 달았다.
투우가 음식을 마저 씹기 시작하자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주변에는 요새 주가 변동부터 그릇을 내려놓는 여직원을 사이에 두고 품평하는 말까지 온갖 헛소리가 혼재했다. 창가 자리여서 점차 몸이 식는 게 느껴졌다. 바깥이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다. 갑작스레 내부 간접조명이 켜져 마주 앉은 얼굴색이 급변했다. 투우는 어느새 핏물만 흥건한 접시를 두고 입가를 닦고 있었다.
웨이터가 다가와 미국 가정식을 연상케 하는 홀케이크와 모양이 다른 컵 두 개를 내왔다. 조각은 말린 오렌지 단면이 반쯤 침수된 자신의 커피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인공적인 시트러스 향이 났다. 매력적이지 않은 메뉴 선정이었는데 따뜻하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잔을 두 손으로 크게 감싸며 쏘아봤더니 투우가 플레이팅에 쓰인 서양란을 문 채 웃었다. 징그러운 장난질 하며…. 주황색 조명이 비친 꽃은 분홍색으로 보였다. 김이 샌 투우가 꽃잎을 입술에서 떼어냈다.
“그래서.”
조각이 말했다.
“뭐 하는 건데?”
“저번에 내가 밥이나 같이 먹쟀잖아.”
조각은 시선을 내려 소용돌이 모양을 띤 진한 분홍색 크림의 열과 행을, 케이크 중앙에 병든 눈깔처럼 덩그러니 박힌 새빨간 체리를 물끄러미 본다. 조각을 발견하고 벌쭉 웃으며 팔뚝을 움켜쥐던 손길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보통은 살이 드러나는 짓을 하지 않는데 하필 여름용 정장은 소매가 뚫려 있었고, 안이 더워 잠깐 겉옷을 벗고 있던 게 실수였다. 조각은 그대로 손목을 꺾어 메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여기서 난투를 벌이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차라리 칼질을 하는 게 나았을 텐데. 벌건 핏기가 도는 고깃덩이 말고 서로의 약한 부분만 노리는 치명적인 짓들을. 조각은 무심코 커피잔을 기울였다가 쓴 음료에서 겉도는 상큼한 맛이 역겨워져 잔을 저리 밀었다. 투우는 노상 그랬듯이 단짝과 장난치는 실없는 남자애처럼 킥킥거렸다.
그가 자기 몫으로 바쳐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진하고 쓴 냄새가 나는 커피를 끼얹었다. 아포가토를 담은 컵이 수프 컵처럼 얕고 넓어서 사르륵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 잘 보였다. 쓴 커피 향을 뚫고 단내가 풍겼다. 조각은 녹으면 끈적한 국물이 될 뿐인 것을 음식이라 내놓는 짓이나 그걸 또 돈 주고 먹는 행태를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물컵을 들고 입을 헹구기만 했다. 물에서도 밍밍한 레몬 맛이 났다.
투우는 아이스크림 겉이 다 녹을 때까지 그것만 물끄러미 보다가, 작은 스푼으로 디저트 절반을 푹 퍼서 입에 넣었다. 그의 입가에 예의 형용하기 힘든 국물이 묻어났다. 투우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따라서 그의 다음 말을 곧장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싫어?” 투우가 물었다, 뜬금없이.
조각은 대답이 막힌 걸 뒤늦게 알고 입술을 빠끔거렸다. 시선이 이상해지는 걸 막을 수도, 막을 필요도 없었다. 그럼 뭐 귀염받고 싶어서 저러나. 다 커서 저러는 건 대체 무슨 해괴한 꼴이고 왜 하필 나인가. 돌이켜봐도 조각은 서른 먹었을 때는 이미 타인에게 관심을 구걸하지 않을 만큼은 성숙했다. 투우는 명백히 유치하게 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늘 유치했다. 조각은 간신히 이해할만한 지점을 찾아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안 싫어.”
“그럼, 좋아?”
“아니 그다지 좋지는.”
“오늘 괜찮았어? 음식은, 입에 맞았고?”
“커피가 제일 끔찍해.”
투우가 여전히 입에 묻힌 채 웃고는 아포가토 컵을 조각에 밀어주었다. 조각은 은수저를 들어서 뭉글뭉글한 빙산처럼 남아 있는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었다. 자잘하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 맛에 혀가 간지러웠다. 음식을 남기는 게 꺼림칙해 그런 것이었는데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투우가 또 싱글거리고 있었다. 식사 내내 그런 표정이었고 조각은 인제 와서야, 아무리 미친놈이라 한들 저렇게까지 웃는 건지 궁금해졌다.
배가 부르기도 했고 사람들이 술을 기울이기 시작한 시점이라,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은 상표가 붙지 않은 새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나 간다. 네놈도 적당히 거리 두고 가.”
“어, 잘 가고, 누가 뒤통수 안 치게 조심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큰아들이 있다면 이럴까 싶다. 조각은 투우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쟤가 귀염받고 싶어 저러나 했던 생각을 철저하게 접어 두었다. 그 나이를 먹고 정당하게 애정을 구할 줄도 모르는 남자의 존재는 살인에 견줄 재앙이다.
조각이 막 나가려고 할 때 그를 붙잡은 카운터 직원이 정찬은 따로 계산해야 한다는 말을 상냥한 말씨로 되풀이했다. 따로? 네, 뷔페 이용은 무료 시고요. 알고 있었나 해서 앉았던 자리를 보자 등을 돌리고 앉은 투우가 유리창에 얼굴을 비추는 게 보였다. 입가는 말끔해져 있었다. 조각은 유리에 비친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직감을 느끼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직원은 얼굴이 하얀 달 같은 아가씨였는데 대학에 다닐 나이로 보였다. 조각은 더 캐묻지 않고 현금을 꺼내 값을 치렀다. 카드나 스마트폰이 아닌 만 원권이 그것도 몇 장이나 나오는 걸 직원이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보았으나 아무 말 없이 거슬러주었다.
하여간 아양 떨 줄은 죽어도 모르는 녀석.
조각이 가고 나서 홀을 성큼성큼 가로지른 남자가 짧게 물었다. 거의 공격적이기까지 한 기세였다. 저 여자가 계산했어요? 예? 아니 아까 할망구 말이야. 돈 내고 갔어요? 아 네 전부….
투우는 허, 하고는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려다가, 빗어넘긴 헤어스타일을 상기하고는 말끔한 이마만 문질렀다. 하여간 지독한 여자. 그가 중얼거리는 걸 들은 얼굴 흰 아르바이트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투우는 그제야 빙긋이 웃으며 팁이라며 얼마를 쥐여주었다. 또 현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