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친구 사이, 양식(메뉴 랜덤) 키워드로 작성했습니다! 사프란 홍합 수프와 바게트, 라따뚜이(영화 '라따뚜이'에 나온 버전 레시피-콩피 비알디), 커피를 먹고 마셨어요 ^v^
아틀러스는 귓불이 빨개진 채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도마 위에 흐트러진 비뚤배뚤한 애호박 조각들이 풋풋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싱크대에는 아직 손질도 시작하지 않은 양배추가 턱 놓여 있었는데, 겉이파리 낱장 하나까지 반질반질한 것이 퍽 질 좋은 채소임이 분명했지만 아틀러스는 그 왕성한 기세에 오히려 기가 질려버렸다.
라따뚜이를 만들고 싶었다.
식사 약속은 점심 즈음이 적당하리라고 여겼는데, 식료품점이 여섯 시 무렵에 여니 오픈 시간에 맞추어 장을 봐와 손질하고, 레시피에 적힌 시간대로 요리하면 여유 있게 준비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틀러스는 돌아오는 길 짧은 오르막길에서 장바구니를 놓치는 것으로 불행의 시작을 목격했다.
그는 양배추를 주우러 달려 내려가는 것이 세 번 반복될 때까지 오늘은 유달리 운이 없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틀러스는 대체로 행운이 따르는 편이었고, 더욱이 자신이 특별하게 여기는 오늘은 축복이 따르리라 하며 자신의 체질을 믿어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운이란 말 그대로 운,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기이한 확률이란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새벽부터 서성이며 식료품점 주인이 문을 여는 걸 기다리고, 장바구니를 서너 번 놓치고, 목줄 없이 산책하던 개에게 쫓기고, 길을 막은 이삿짐 화물차를 돌아 헤맨 끝에 당도한 카페에서는 메뉴를 잘못 알아들은 점원의 실수로 차가운 음료를 받아 마셔야 했지만, 그는 조금 눅눅해지고 암담해졌을 뿐 녹초 상태는 아니었다. 정말 힘이 빠진 건 홍합을 손질하다가 손가락을 베였을 때였다. 얕게 베여 산뜻하기까지 한 빨강이 비치자 그는 유난한 불행이 실감 나 참담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모든 게 엉망이어서야 요리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기운 없이 끓인 홍합 수프는 그의 컨디션만큼 시무룩해 보이는 데다, 맛을 보니 어딘지 심각하게 평범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아틀러스는 화들짝 놀라 앞치마를 입은 채 달려 나갔다. 조급하지 않게 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는 분명히 손이었다. 시계는 아직 열 시가 채 못 된 시각을 가리켰다. 이렇게나 빨리? 그러나 한 손에 쇼핑백을 안고 있는 손은 무척 태연한 표정이었다.
“무…. 무슨 일이야?”
“응? 초대했잖아. 냄새 좋다, 요리해?”
이렇게 말하는데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아틀러스는 옆으로 비켜서서 손을 안으로 들였다. 문을 닫고 돌아서자 손이 식탁에 갈색 봉투를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문득 호기심을 느낄 때 손이 시계를 보고서 슬며시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난처하게 했네.” 다정한 투였고, 아틀러스는 아침나절 내내 홀로 견뎌온 불운이 문득 서러워졌다. 그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아냐….”
“무슨 문제가 있나 봐.”
봐도 돼? 손이 그토록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휘젓다 만 냄비를 가리켰다. 아틀러스는 커다랗고 싱싱한 양배추가 원상태 그대로 담겨 있는 싱크대를 슬쩍 등으로 가렸다. 응, 봐도 돼. 손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비린 것을 익힌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희고 되직한 수프는 투명하게 볶은 양파와 마늘 조금, 이파리째로 쓰는 허브, 그리고 백포도주를 넣은 것이 분명했다. 맛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이미 홍합살도 다 발라내어 버터와 함께 끓인 것 같았다. 나무 숟가락을 대자 크리미한 층 아래에 고여 있던 희뿌연 국물이 우러났다. 직접 맛을 본 손은 아리송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역시 그렇지? 맛이 없지는 않은데, 뭔가…”
“응. 부족한 느낌. 맞다, 빵 사 왔어.”
“아.”
잊고 있었다. 중간에 길을 돌아오느라 원래 경로에 들르려던 빵집에 가지 못했다. 손이 챙기지 않았다면 부족한 식사를 할 뻔했다는 생각에 아틀러스는 붉힌 뺨을 긁었다. 손이 봉투 안에서 바게트와 크림치즈를 꺼내 놓으며 말했다. “자, 그래서 뭐가 문젠데?”
손은 머뭇거리는 아틀러스를 대신해 손수 양배추를 손질했다. 아틀러스는 그 옆에서 가지를 도마에 놓고 열심히 잘랐다. 두께가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되찾은 아틀러스가 나머지 재료를 알맞게 자르고, 팬에 볶아내는 모습을 보며 손은 책장을 건드리거나 라디오를 틀었다. 긴장감 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얼마 후 새로 문제가 발생했다. 갑작스레 오븐이 작동을 멈춘 것이다. 둘은 가열된 오븐의 열기가 닿아 볼이 발개진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뾰족한 수는 나지 않았다. 손이 단호한 얼굴로 결단을 내렸다.
“볶아도 되지 않을까, 라따뚜이는. 원래 그렇게들 먹잖아.”
“하지만 이미 반쯤 완성해버려서. 고명만 얹어 익히면 되는데, 프라이팬으로는 잘 안 돼.”
“음, 그렇다면야.”
갑갑하단 투로 말한 손이 어떤 버튼을 눌렀다.
왜 ‘어떤’ 버튼이냐면 둘 다 그게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평소에 아틀러스는 안 쓰는 것이었다. 설명서에 뭐라 적혀 있는지는 당연히 기억나지 않았다. 기겁하며 보는 아틀러스를 손은, 원래 빨간 버튼은 누르라고 있는 거야, 따위의 말로 위로했다. 그러나 아틀러스는 결단을 내렸다. 오븐 전원을 꺼버린 것이다.
침묵이 일고, 다시 켰을 때 오븐을 산 이래 처음 듣는 삐비빅 소리가 났다. 곧 오븐이 가동되는 나직한 시동음이 들렸다. 예열을 잊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손이 딱딱해진 바게트를 잘라서 렌지에 돌렸고, 아틀러스는 식탁보를 깔고 접시를 꾸몄다. 은방울꽃을 화병에 넣고 자리에 앉자 마침 햇살이 집 안으로 쏟아졌다. 아틀러스는, 힘쓰는 일을 한 게 아닌데도 뭔가 몰아쳤다는 기분에 한숨을 내쉬었다. 손이 식전 빵을 크림에 찍어 먹으며 웃었다.
“잔뜩 허우적거린 기분이네.”
“미안해.”
“뭘. 재밌었어. 시작할까.”
새벽부터 고된 컨디션 난조를 겪은 아틀러스는 말없이 딸그락거리며 수프를 떠먹었다. 체온에 맞게 따스한 온도나 묽고 고운 국물이 마음에 들었다. 와인을 좀 과하게 쏟았다 싶었는데 덕분인지 해산물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어쩐지 더 맛있어진 것 같았다. 갑자기 입맛이 돌 리는 없고… 아틀러스는 숟가락을 든 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방울꽃을 바라보던 손이 시선을 마주쳐오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말했다.
“네가 사프란을 잊었더라고.”
“아, 정말 큰일 날 뻔했네.”
“큰일이야?”
“비싼데, 일부러 사 온 거거든…… 너랑 식사하는 게 아니면 안 골랐을 거야.”
숟가락을 물고 있느라 뒷말을 거의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손은 기특하다는 듯 얼마간 아틀러스를 보다가, 그의 접시에 라따뚜이를 덜어주었다. 둥글고 얇게 썰어 원을 그리며 겹쳐놓은 애호박과 가지가 기름기를 머금고 아직 지글거렸다. 구운 채소의 달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포크로 한 조각 떠먹은 아틀러스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중간에 오븐이 꺼져 난감했던 것치고는 속이 덜 데워져 차갑거나 물기가 심하게 배어든 기미 없이 바삭바삭했다. 평소보다 간이 세게 되었는데 가공한 고기를 넣지 않은 터라 이쪽이 더 감칠맛이 돌았다.
음식을 먹을수록, 수프 그릇에서 터져 나오는 은은한 사프란 향기가 가까이 느껴졌다. 접시를 거의 비우고 나자 식탁 위가 설레는 꽃향기로 가득했다. 화병에 꽂아둔 은방울꽃이 생각보다 생동감 있는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둘은 느긋한 기분으로 커피를 끓이는 데에 동의했다.
모카포트를 불에 얹으며, 가까운 블록에 서 있던 이삿짐 차 얘기가 나왔다. 거기 음식점이 생기나 봐. 음식점? 응, 이탈리안 전문. 손이 대답 없이 조용했다. 아틀러스가 돌아보자 손은 다소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네가 해주는 것보다 맛있을까?”
“…가, 가 보면 되지.”
“그래, 다음에 같이 가자.”
“그런데 맛있었어?”
“무척이나. 마법을 건 거야?”
농담 같은 물음이었다. 아틀러스는 가볍게 대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고, 커피잔 둘에 검은 커피를 따라서 각설탕 단지와 함께 쟁반에 놓았다. 손이 팔을 뻗어 반짝이는 상아색 쟁반을 받아들었다. 집게가 있었지만, 그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흰 설탕을 집어 잔에 넣었다. 티스푼으로 젓는 소리가 잠시 났다. 아틀러스는 그때 입을 열었다.
“오늘 운이 엄청 나빴거든. 그래서 음식은 잘 됐나 봐.”
“액땜이었는지도.”
“그러게, 그랬는지도…….”
시간이 지나며, 식탁 다리를 타고 올라온 햇살이 손의 어깨와 이마에 닿고 있었다. 아틀러스는 싱그러운 화이트플라워 향기와 식탁에 남은 음식 냄새, 풍부한 커피향기… 조그만 빛살에서, 감각하기 힘든 집안의 냄새를 선명하게 느꼈다. 이럴 때가 있지 않은가. 익숙한 곳이 이상토록 다르게 느껴질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