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배우게 할 때처럼, 칸은 녹스의 손에 제 손가락을 걸고서 천천히 몸을 적셨다. 수영을 가르쳐 달라는 말은 별생각 없는 잡담 같은 것이었는데 그는 진중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농담을 즐기는 것과 별개로 그는 언제나 진지하기도 했었지, 생각하며 녹스는 물이 비집고 드는 손을 움찔거렸다. 옷이 미지근한 온도를 머금고 다리에 감겼다. 무심코 내려간 시선이 헐렁하게 맞잡은 손등에 닿았다. 같은 것을 보고 있지만 같은 걸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칸은…… 이 물의 온도나 나의 체온과 몸에 들러붙는 옷가지의 느낌을…… 모르겠지. 아니 알더라도 희끄무레한 회상에 불과할 것이며. 녹스는 찝찝하고 습한 소금기가 입안에 머무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것조차.
물을 감각해야 한다는 건 칸의 주장이었다. 녹스는 제대로 감각할 수 있는 주제에 그게 이상한 말처럼 여겨졌고, 그러나 전문가의 판단을 믿었으며 믿고 난 다음에서야 칸이 무슨 생각으로 느끼자는 말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평소처럼 무심하게 건넬 질문으로는 무례했기 때문에 잊을 때까지 대답을 듣지 못할 질문이라고 그는 넘겨짚었다.
해변에 있을 때보다 유연해진 파도가 허리부터 가슴을 들이받고 지나쳤다. 바다를 등지고 선 칸은 목덜미까지 젖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얼굴이 가까웠다. 녹스는 그 순간 칸의 눈에서 핏방울을 보았고, 얼굴을 갈퀴고 지나간 칼날과 그야말로 코앞에서 목격하고도 낯설었던 핏물의 궤적을 연상했다. 전혀 다른 상황을 떠올릴 정도로 타인과 얼굴을 가까이한 때가 드물었다. 낯선가. 거울이 없어 한참 후에야 웅덩이에 비추어 보았던, 얼굴의 흉터만큼…… 녹스는 자신이 흉터가 상처일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무서워?
칸이 물었다. 녹스는 저도 모르게 낯설다, 고 대답할 뻔했다. 대답을 삼키고 나서야 그대로 뱉더라도 이상할 상황은 아니었다는 걸 재차 깨달았다. 따가운 볕에 달아올라 미적지근한 물살이 느릿느릿 팔꿈치를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녹스는 곰곰이 고민한 듯이(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말했다. 낯설지. 이때 그는 물결의 감각보다도, 왜 칸의 접근이 기꺼운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칸은 소금물이 묻은 입맛을 다셨다.
“익숙해져야 해. 물속에서 몸이 굳으면 안 떠오르거든……”
“요컨대 친해져야 한다?”
“그렇게 통나무처럼 굴지 말란 소리야.”
“하지만 통나무는 물에 뜨던데.”
“그럼 그것보다도 모자라는가 보군.”
칸이 웃음기 어린 소리를 냈다. 이쪽은 서쪽 해안이므로 정오에서 조금 더 기운 해가 머리 위로 쏟아져, 녹스는 비트는 듯이 웃는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 같았다. 그는 커다란 물만큼 생경한 물건을 보는 기분이 되었다.
헛생각이다. 수영에 익숙지 않은 몸이 겁을 먹은 거다. 녹스는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가 보았다. 칸은 말리지 않았고, 녹스는 허리 이상으로 물이 차올라 파도에 얼굴이 젖을 만큼이 되어서 멈추었다. 익숙해지지 못한 부력과 비교적 싸늘한 수온 탓에 숨을 쉬는 게 곤란해졌다. 섬의 해안이 완만하지만은 않았기에 그래도 둘의 간격은 많이 멀지 않았다.
녹스는, 시체라면 물에 뜰 수 있고, 그런 시체를 모사하는 것이 어쩐지 내게는 모독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을 삼켰다. 게다가 지금은 벌건 한낮이지 않은가. 신의 눈동자가 시선을 내리꽂는 가운데 죽음을 모방하는 일은…… 매우 매혹적이긴 했으나, 그는 높은 자에게 삿대질하기에는 지쳤고, 그럴만한 권리도 없다, 고 욕구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자 이쪽으로 돌아선 칸의 젖은 몸이 보였다. 녹스 자신의 옷도 형편없이 젖어 있을 테고 그건 섬 생활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억눌러 놓은, 피로한 분노 외에 다른 엉뚱한 곳에서 솟는 열망을 감각했다. 칸이 알아야 한다고 제안했던 물의 감각과는 아주 다른 방향이었다. 그는 거스르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 물었다.
송장의 삶을.
수면은 해를 잔뜩 머금고 끊임없이 금빛으로 부서졌다. 파도는 애교 수준을 넘지 않았다. 녹스는 무언가 한참 유연하고 강한 힘이 교태스럽게 몸을 밀고 뒤꿈치를 당기는 가운데 다시 칸에게 다가섰다.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턱밑에 짧은 그림자가 졌다. 녹스는 길가에 불쑥 자란 풀의 이름을 더듬어보는 것처럼 칸의 손을 만졌다. 아래쪽 물살보다 윗물은 비교적 뜨듯했는데 칸의 손은 아랫물만큼 차갑고 축축했다. 하지만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탄력이 있고 부드럽기까지 한 살갗이다. 모르는 걸 배우러 온 것이지만, 녹스는 고집스레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꺼냈다.
“유리를 공예 할 때는… 긴 대롱에 빨갛게 녹은 유리를 붙여서 숨을 불어넣기도 하는데. 그건 나보다는 큰형이 맡는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칸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얼굴이었다. 그는 표정을 가늠하기 힘들어 주로 무표정한데, 그걸 또 읽어내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허락 없이 손바닥이며 손가락 사이를 주물럭거리고 있는데도 칸은 군소리를 안 했다. 녹스는 골똘한 눈길로 칸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직 완전히 굳기 전 유리는… 물거품 같지. 특별히 완벽하고 오래 유지되는 물거품.”
당신을 보면 그게 생각나. 전에는 몰랐지.
한창 일을 할 때는 거품이 알만한 큰물을 본 적도 없었으니까.
철과 유리를 식히는 공방의 물은 샘에서 퍼온 독에 든 것뿐.
그런 이야기였다.
나가자, 고 칸이 대답했다. 빛의 각도를 살피고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대답이라기보다는 전문적인 식견에 의지한 주장 같아서, 녹스는 나 아직 바다랑 안 친한 것 같은데, 따위의 싱거운 대꾸를 하는 대신 물살에 떠밀려 처벅거리며 해변으로 향했다.
모래톱에 오르자 잡고 있는 손이 느껴졌다. 물속에서 잃어버렸던 지상의 감각이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있었다. 엷은 바람에도 옷이 늘러붙은 몸 곳곳이 식어버렸다. 칸은 자신의 몸은 놔두고 녹스의 옷자락을 잡아 대신 짜주더니 입을 맞추었다. 해가 더욱 벌게지며 조금 더 서쪽으로 기울었다. 볕에 노출된 왼뺨과 귓가가 뜨거웠다.
바닷물이 스몄으므로 짜디짤 것이라고 여겼지만 날것의 소금기는 무척 썼다. 칸이 천천히 입술을 물고 어깨를 붙들고, 실수로 지나치게 물어 뜯을까 봐 조심스레 멀어지려고 했기에, 녹스는 그런 그의 양 뺨을 잡고 입을 벌렸다. 냉랭한… 엷은 피의 맛이 났다. 상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녹스는 고개를 비틀었다. 벌어진 입술이 문질러지다가 다시 맞물렸다. 다르게 쉬는 숨의 박자에 밀려서 금세 호흡이 가빴다. 칸의 손이 점차 내려가 팔꿈치를 쥐었다. 다음에는 옷을 쥐어짜느라 주름이 남은 허리께를 만졌다. 녹스는 체온이 식은 등과 불길에 스치는 듯한 뺨, 감각의 괴리에 몸을 떨었다. 소금물을 조금 머금은 입안을 빠는 소리가 났다. 짠맛도 났다. 자기가 하는 짓이 아닌 것 같기도 했고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저지른 짓 같기도 해서 녹스는 입술을 떼고도, 잠시 이마를 맞댄 채 있었다. 칸은 이런 몸정에 덜 익숙한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녹스가 손길을 내려 목에 얹었다가 양팔을 툭 떨어뜨렸다. 그는 미약한 열씨가 남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맥아리 없는 말투였다.
“왜…….”
“…하고 싶은 얼굴이었으니까.”
칸이 혀로 입안을 훑으며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불그스름한 점이 남은 상대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선혈을 남긴 상처 자국이지만 늪처럼 습하고 가라앉은 색채에서는 선정적인 빨강이었다.
녹스는 눈길을 따라 손가락으로 입가를 더듬었지만, 상처를 찾아내진 못한 채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되물었다.
“내가?”
“아니었나?”
“…아니, 맞을걸. 아니, 모르겠어. 아마도. ……나쁘지 않았어.”
그럼 됐어, 라는 듯이 칸은 마른 모래톱에 앉았다. 낮 내내 데워진 모래는 축축한 옷가지와 피부에 쉽게 달라붙었다. 돌아갈 때는 모래투성이가 될 터라고 녹스는 생각했다. 생각하면서 그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뭍으로 빠져나올 시간이라고 여겼던 것과 달리, 아직 한창 낮이었다. 녹스는 왜 일찍 나와버렸냐고 물으려다가 제때 입을 다물었다. 희고 비스듬한 가르마처럼 햇살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파도 위를 가뿐하게 질주한 빛과 열이 내민 발등을, 가슴팍과 이마를 적셨다. 모래가 닿지 않는 귓등이며 팔뚝에서는 잔뜩 묻혀온 바다가 물비늘처럼 반짝거렸다. 원체 없는 생각을 더욱 날려버리는, 태만한 풍경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