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은 아량 넓게 곤란해하는 시종을 살짝 포옹해주었다. 시종은 당황한 듯했으나 오지랖 넓은 상류층의 화해법인 줄로만 알고 얼굴을 붉히며(데이빗은 그럴 만큼 세련된 차림새였다), 다시 한번 꾸벅 절하고는 황급히 떠나갔다. 데이빗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아서며 손가락에 걸린 열쇠 꾸러미를 빙빙 돌렸다. 휘파람까지 불면서.
분명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들은 단지 파티가 열린 복도를 지나다가 부딪힌 것뿐이었다. 데이빗 측의 고의였긴 했지만, 서버란 원래 이런 위험을 모두 떠안아야 하는 하류층의 직업일 뿐이다. 보아하니 조금 전의 소년은 어리고 미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미숙한 거야 이 파티 전체가 그렇지.’
데이빗은 만족스레 웃고는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정치계 고관이며 그들의 비밀스러운 일행만이 모이는 이러한 무도에 한 자리 차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위조된 초대장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접대원이라니. ‘디에브 경이십니다!’ 외치는 목소리는 여타 귀족의 입장을 알리는 것과 다름없이 우렁찼고, 막 춤이 시작된 터라 소란 중에 고고히 묻혔다. 오늘 죽어 나갈 당신을 기꺼이 살려주마, 같이 오만한 생각이나 하며 데이브는 줄곧 여유작작하니 돌아다녔다.
이제 밀회 장소만을 찾아가면 된다. 데이브가 모르는 건 그것뿐이었다. 물론 시녀 몇을 구워삶으면 아무도 드나들지 말라며 술과 담배를 대령했던 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녀가 물리적으로 말이 안 통하거나 총명한 축이라면 힘들겠지만.
그때였다. 그가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소녀와 부딪힌 것은.
“저기요!”
갑자기 부딪친 것치고 반응이 제법 또랑또랑했다. 무례하다고 해야 하나. 데이브는 실내에서도 고수하는 털코트 앞섶을 툭툭 털고는 찡그리며 그 애를 바라보았다. 같은 메이드복을 입긴 했지만 걷어붙인 소매며 앞치마를 보아하니 부엌일 하는 하급이었다.
데이빗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좋은 기회인가 싶기도 했다.
“아, 괜찮습니다. 혹시 일은 힘들지 않…”
“댁 걱정 들으려고 부른 줄 알아요?”
정확히 따지자면 걱정도,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갑자기 튕겨 나와 머리를 박았다면 모를까) 하도 어처구니없어 데이빗은 이 철모르는 소녀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의 일생에 두고두고 기억될 패착이었다.
소녀가 말했다.
“아까 대체 뭐한 거예요?”
“……아까라면?”
“열쇠! 제 동생 들이받고 열쇠 가져갔잖아요.”
“솔직하게 말해도 될지요?”
“부디 그러시지요?”
급기야 그 애는 데이빗의 말투를 조롱 조로 따라 하기 시작됐다. 거참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그는 모르쇠 일관을 선택했다.
“그건 제가 들이받은 게 아니라 그쪽 실수로 부딪혀온 겁니다. 열쇠는 무슨 뜬금없는 소린지 모르겠네요.”
“거짓말, 제 동생은 워낙 조심조심하느라 특히 당신네 우아한 귀족한테 실수할 애는 아녜요. 그리고 저택 열쇠 가져갔잖아요? 이미 다 봤으니까 빙빙 돌려가며 모른 체할 생각 말아요.”
“그게 동생이었습니까? 그건 죄송하게 됐지만 저는 정말로…….”
“이름이 뭐예요?”
“……그쪽은요?”
“에이브릴. 성은 없어요.”
“그거 잘됐네요, 이쪽도 성은 없는데. 데이빗. 그럼 이제 가주십쇼.”
“와, 말투 바뀌는 것 봐. 제가 부엌데기라고 아무도 내 말 안 믿을 줄 알아요? 작년에는…….”
복도 너머에서 누군가 걷는 소리가 났다. 카펫에 흡수되어 둔한 연회장 소음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청각이 민감한 그에게 그건 분명 발걸음 소리였으므로 데이빗은 바로 옆방의 문고리를 당겨 에이브릴을 집어넣었다. 분명 그의 머릿속에서는 매끄러웠다.
그런데 문이 잠겨있었다. 데이빗은 제기랄, 하며 열쇠를 꺼내 서둘러 맞춰보았다. 다행히 두 번째가 딱 맞아들었다. 그걸 본 에이브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 봐! 맞네!”
“제발 조용히 좀 하고.”
잠시 단비 같은 침묵.
이면 좋았겠으나, 발소리가 멀어지자 에이브릴이 다시 따랑따랑하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귀찮은 듯 설레설레 손을 휘젓고는 열쇠를 내밀었다.
“좋아요, 좋아. 이걸 원하는 거죠?”
“또 사과도요.”
“동생을 넘어뜨린 데에 대한? 뭐, 그러죠. ‘미안합니다.’”
“성의 없잖아요!”
말하자마자 에이브릴은 팔짝 뛰어오르며 손을 뻗어왔다. 데이빗은 유연한 동작으로 열쇠 쥔 손을 당겼다. “뭐예요?” “사죄했으니 그쪽도 뭔가 해야죠.”
이번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건 에이브릴이었다. 미안하다 한마디 하는 게 거래인 줄 아나 봐. 잘 배운 사람 같은데. 그러나 에이브릴은 때로 잘 배운 사람들이 실수하기도 한다는 걸 기억해내고, 관대하게 처사하기로 했다.
“뭘 원하는데요? 마무리 케이크는 못 보여줘요.”
“단 건 필요 없어요. 담배와 술을 갖다주는 시녀가 누굽니까?”
“그거야 메이드면 누구나 하죠.”
“좀 비밀스러운 자리에요.”
“그런 게 어디 한두 갠가…… 아, 아까 메이와가 시가랑 브랜디 가지고 갔어요.”
“어디로?”
“3층 가장 안쪽에서 두 번째… 그런데 왜요? 누구 만나요?”
에이브릴은 누르고 있던 호기심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미 알려준 게 있으니 발을 빼기도 어렵고, 상대가 거절하기도 어려울 테고, 또 지금 아예 끼어들지 않으면 뒤집어쓸지도 모르며 일자리에서 잘리면 추천장도 받지 못하리라는 계산속이 있기도 했다. 이런 데서 겁먹어 내빼다가 덤터기만 쓰고 쫓겨난 하인을 이미 몇 본 터다. 물론 높으신 분 일에 공손하면서도 최대한 신경 끄는 것이 충실한 하인의 임무겠지만, 그게 어디 알 반가? ‘쫓겨난 애들도 그런 생각은 못 했을걸.’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만 보는 데이빗을 향해 에이브릴이 재차 물었다.
“그런 걸 왜 물어봐요? 뭐 하려고? 그쪽 누구신데요?”
“아까 말했듯 데이빗. 설명하자면… 탐정이죠.”
“이미 들었던 거고 뒤에 건 설명 안 되는데요.”
“아, 시끄러워. 그냥 따라오세요.”
에이브릴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3층 복도를 걷는 와중에, 에이브릴이 멈추어 섰다. 데이빗은 왼쪽 두 번째 문을 두들기려다가 에이브릴을 보며 의문 어린 시선을 던졌다. 오른쪽 벽감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에이브릴이 그에게 손짓했다. 데이빗은 허, 하면서도 이 건방진 짓에 익숙해진 터라 그 앞까지 걸어가 주었다.
그 순간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것을 떨어뜨리는 듯한… 그리고 발소리. 아마 시가 나이프를 떨어뜨리고 줍는 거겠지. 안쪽엔 하인이 없을 테니까. 맞은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면, 해산할 생각이었나.
‘잘했어요.’
데이빗이 어리둥절해 있는 에이브릴에게 칭찬 겸 미소를 지어주지만, 에이브릴은 다시 해괴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문을 똑똑 두들겼다. 더도 덜도 없이 하인 같은 겸손한 태도였다.
안쪽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러자 데이빗은 한숨을 쉬며 에이브릴을 벽에 붙어 비켜서게 했다. 그가 품에 손을 넣은 채 다른 손으로는 열쇠를 잘칵이기 시작했다. 문이 열렸다. 담배 냄새와 자욱한 푸른 연기 너머로 정체 모를 황색 주머니와 사람의 구둣발이 보이자마자… 데이빗은 에이브릴의 반대편으로 몸을 던져넣었다. 소리가 줄어든 총성. 잠깐 상황을 이해 못 하던 에이브릴이 입을 막으며 경악했다.
데이빗이 느긋하게 선수 쳤다.
“바스티아 남작.”
우체부 차림새의 소년이 움찔하며 그를 보았다. 데이빗이 그 옆에 선 자를 눈짓하며 말했다.
“그리고 뭐… 기술자인가요? 좋습니다. 거래를 제안하러 왔어요. 폭탄은 좀 미뤄주시죠.”
소년이 손길을 멈추었다. 가장 안쪽에 앉아 있던 지긋한 노인, 바로 바스티아가 입을 열었다.
“뭐 하러 거래를 하지? 다 알고 왔을 텐데.”
“맞습니다. 조금 이따가 만날 귀족을 살해하실 생각이었죠? 겸사겸사 파티도 좀 망치고.”
살해 대상의 이름을 꺼내지 않는 데에 남작은 코웃음을 쳤다. 빠져나갈 구멍이란 거지. 그가 말했다.
“모르는 일인데. 게다가 이 파티는 망칠 필요도 없더군. 모든 게 엉망이야.”
“하인들이 젊은 걸 보면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에이브릴이 약간 발끈했지만, 데이브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당신들의 친구가 아닙니다. 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그렇다면 원하는 건?”
“오늘 그 말 두 번째로 듣는군요. 하지만 좋아하는 대사예요. 폭파 준비를 멈추고, 저와 협상합시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거든요.”
옆에서 지켜보다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년이 모자를 휙 벗어제꼈다. 굽실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파도치며 흘러내렸다. “무례하긴!” 기술자 같았던 남자가 옆으로 비켜섰다. 소년, 어설픈 남장을 했던 자(데이빗은 그가 남작의 손녀인 걸 알아보았다)가 대신 앞으로 걸어왔다. 손에는 총을 쥐고 있었다. 그가 데이빗 가까이에서 씹어먹을 듯 속삭였다.
“지금 당신을 죽이면 되는데 우리가 왜?”
“두 명을 다요?”
그제야 눈이 닿은 듯, 숨어 있던 에이브릴과 마주친 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작이 그만하자는 듯 끼어들었다.
“나도 당신을 알고 있네. 데이빗. 아쉽지만 본명은 모르겠군.”
“절 알아봐 주시다니 감사한 일이군요.”
“워낙 설치고 다니니까. 족제비 같다지.”
“그건 오명인데요.”
“아무튼. 제안은.”
“이번 계획을 취소하고 다음엔 제게 의뢰하십시오.”
“맹랑하긴.”
“무엇이든, 더 완벽하게 해결해 드리죠.”
“탐정이?”
“탐정이니까요.”
“좋아. 애멋, 그만해라. 떠나야겠다.” “할머니!”
데이빗이 웃는 얼굴로 물러서며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충혈된 눈을 한 애멋과 남작이 신속하게 짐을 챙겨 옷 안에 감쪽같이 숨기는 걸 보고 에이브릴이 입술을 달싹였다. ‘저러니까 아무도 못 봤지, 이걸 왜 우리 책임을 물어.’
“당돌한 남자군. 하지만 더 조심하도록 해. 모두가 이렇게 너그럽진 않을 거야.”
떠나며 애멋이 던진 말에, 데이빗은 빙긋 웃으며 묵례했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에이브릴은 제대로 입을 열 수 있었다.
“……탐정치고 별일 안 하네요?”
“살인을 막았잖아요.”
“명성을 써서? 뭐 귀족이나 다름없네.”
“귀족이니까요. 있는 건 써야죠.”
“바스티아 남작은 시종을 갈아치우는 걸로 유명해요. 아무도 두 달 이상 일하는 걸 못 봤어요.”
“그거참… 죽어도 싼 인물이군요?”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당신은 대체 누구 편이에요?”
아직 방 안에는 온기 스민 담배 연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데이빗은 훅훅 허공을 휘젓곤 콜록거리면서 대답했다.
“그야 내 돈 편이죠. 당신은 누구 편인데요?”
“……내 편이요.”
“좋아요. 글은 읽을 줄 압니까?”
“조금은?”
“그 정도면 충분해. 예민하고, 이기적이고, 필사적이진 않고, 꽤 똑똑하고 딱 부러지고. 좋네.”
“뭐라는 거야?”
“나와 같이 갑시다. 짐 별로 없죠?”
“진짜 뭐라는 거죠? 전 이 저택 부엌에서 일해요. 지금도 혼나게 생겼다고요.”
“이 일 들키면 혼나는 걸로 안 끝날 텐데.”
“잘 알면서!”
“아, 그래요. 잘 알면서 이용해먹은 변태 같은 악당하고 갈 거예요 말 거예요?”
“변태 같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요? 보수는 얼마예요?”
데이빗은 살짝 손짓하고는, 고개를 숙여 에이브릴의 귓가에 속삭였다.
비율 배분에 인센티브제였다.
“좋아요.” 에이브릴이 말했다. “하지만 사람 죽이는 일 안 도와요.”
“가당찮은 정의감이군요. 그런 건 밑일이 귀찮아서 안 맡습니다.”
“아까 그건?”
“그때 가서 봐야죠.”
에이브릴은 그를 잠시 노려보았으나, 곧 표정을 풀고는 앞치마를 탁탁 털었다. 그러고 나서 어질러진 방을 턱턱턱 정리하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그걸 한참 보다가 결국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미련 있는 성격입니까?”
“뒤처리거든요? 블랙리스트 오를 일 있어요?”
“까다롭긴. 어차피 나랑 일할 텐데.”
“계약서 쓰기 전까진 몰라요.”
좋아, 다 됐다. 연기는 어느새 가라앉아 방 안은 어느 정도 깨끗해 보였다. 문을 닫고, 데이빗의 열쇠를 빼앗아 잠그며, 에이브릴이 덧붙였다.
“지금 가서 짐을 챙겨올 거예요. 난 뒷문으로 빠져나갈 테니까 기다려요.”
데이빗은 별생각 없이, 이 합리적인 말에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에이브릴은 벌써 하인용 통로로 들어가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복도 끝으로 미끄러지는 걸 보며 그는 헛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