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각자 소파와 안락의자에 앉아 선선한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신닌이 든 냉커피에서 얼음이 달칵 녹아내리는 소리가 났다. 앨런은 사이다를 캔 째로 마시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청량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앨런이 말했다.
“결혼하자.”
신닌이 유리컵에 입을 댄 채 앨런을 보았다. 느긋하니 차가운 카페인을 음미하던 그가 들은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앨런도 그것을 곧장 알 수 있었는데, 신닌이 커피를 주르륵 흘렸기 때문이다. “뭐라고 했어?” 신닌은 의식하지 못한 채 끈적한 손을 소파 팔걸이에 닦았다.
“들었잖아. 그거 네가 닦아라.”
“뭐?”
“소파 얼룩 지우고 결혼하자고.”
“지금… 5월 다 지났는데?”
앨런은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신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서슬에 신닌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물밀듯 다가오는 경악과 조금 전의 대꾸가 얼간이 같았다는 부끄러움, 슬그머니 기어 나오는 기쁨에 수치스러워진 탓이다. 신닌이 입술을 물어뜯듯이 빨아먹으며 시선을 고쳤다. 햇볕이 들어와 아지랑이가 이는 나무 바닥을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앨런은 그 뒤로 별말 없이 사이다를 마셨다.
그가 캔을 와작 구겨 쓰레기통에 정확히 던져넣었을 때, 이제는 사이다의 포물선을 관찰하기로 한 듯했던 신닌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청혼은….”
그가 소파에 앉아 팔심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굳은 표정을 풀며 피식 웃었다.
“결혼해 줘, 앨런 스타스. 나의 앨런이 돼.”
란도 신닌은 자신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 동그랗고 따듯한 반지가, 다소 미온한 손길을 거쳐 앨런의 약지에, 천천히 들어맞았다.
“청혼은 이렇게 하는 거야.”
“그래.”
둘 다 웃음을 참지 않았다. 카페인을 잃어버린 각얼음이 유리잔 안에서 딸그락, 스러지는 소리.
그런데 이 오후는 어째서 이리도 안온한가. 삶에 가져본 적 없는 평화라고만 믿어버릴 정도로.
“그러자.”
앨런 스타스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진짜 결혼하는 건가?
란도 신닌이 물었다. 앨런의 기억에 의하면 한 다섯 번째였다. 속으로 정해둔 질문 횟수를 맞출 때까지 기다려본바 신닌이 진정할 여유 따윈 없는 것 같았다. 신닌은 지금 정장을 입은 채로도 얼이 빠져 있었다. 자신의 단춧구멍에 분홍색 장미꽃을 꽂아준 것이 앨런 스타스라 착각할 정도로. (그걸 해준 사람은 분명 하나뿐인 코디네이터였지만 앨런은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교회는 예배관 하나가 달랑 있고 왼쪽에 안 쓰는 마구간, 오른쪽에 관리실이 딸려있었다. 기둥이 여덟 개밖에 없으니 성스러운 건물치곤 매우 소규모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정원은 다른 어떤 대성당보다도 탐스러운 장미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환한 잔디밭, 종종 캐모마일이 핀 향기롭고 널찍한 이 양달은 둘의 마음에 단숨에 들어왔다. 물론 결혼까지 남들 눈에 시달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도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액세서리를 고르고 벽에 걸 말린 리스를 조달하고 주례를 맡아주겠단 목사를 쫓아내는 동안, 앨런의 감상은 딱 여기까지였다. 결혼 이야기는 둘의 일상적인 주제가 된 데다가 둘 다 친구들이 화관을 던지고 화동이 쌀을 뿌리는 성대한 혼인에 환상을 가지지는 못했다. 결혼이라, 배우자, 게다가 가족이라.
가족. 그것은 둘 모두에게 미묘한 쓴맛과 기이한 기쁨을 선물했다. 의례적인 웨딩촬영에서처럼 마냥 싱글벙글할 수는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가 변한 것이라고, 앨런은 느꼈다. 신닌은 싱글벙글에서 싱글까지는 어떻게든 갈 수도 있을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둘은 단상 위였다. 원래라면 주례가 있어야 할 곳에 받침대와 반지가 있다.
신닌이 입을 열었다. “우리 진짜 결혼…”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앨런이 말을 끊었다. “그래, 결혼. 하는 거야. 손 내놔.”
전혀 낭만적이지는 못한 처사였다. 그러나 앨런은 나름대로 조심스레 장갑 낀 손을 뻗었고, 신닌이 그 위에 손을 얹을 때까지 기다렸다. 신닌이 좀 수줍기도 한 듯이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이며 손을 건넸다. 앨런이 받침대 위에 놓여 있던 반지를 들고 신닌의 검은 레이스 장갑을 벗겼다. 멀겋고 긴 손가락. 앨런의 것보다는 아주 조금 가느다란…….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자 신닌이 뭐 해, 라는 듯이 눈짓을 해왔다. 준비됐다는 뜻 같아 앨런은 픽 웃었다. 반지는 손가락에 완전하게 맞았다. 앨런이 말했다.
“이건 내가 네게 주는 거야.”
받침대 위에 장식되어 있던 노란 빛 작약을, 앨런이 집어갔다. 그는 여태 란도 신닌을 차지하고 있던 장미꽃을 빼 던져버리고 단춧구멍에 작약을 꽂아주었다. 나름 결혼식인데 내가 준 걸 갖고 있어야지, 쯤의 생각을 했으니 질투라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다. 심장의 발치에도 못 닿을 만큼 미적지근한 투기라 해도.
“너는 이미 내게 줬으니까.”
앨런은 자신의 장갑도 벗어 반지를 보여주었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역시 다르다. 그러나 서로가 얼마간 섞였고, 얼마쯤은 새로 만들어졌다는 반지의 태생과 비슷한 기분이 들기 시작해 둘은 서로를 멋쩍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때 갑자기 신닌이 목을 가다듬었다.
“할 말이 있어.”
“뭔데.”
“이거 언제 끝나?”
앨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란도 신닌은 말을 잘못 뱉었다는 듯 황급히 덧붙였다.
“아, 아니. 뭔가… 느긋하게 하고 싶어서.”
“뭐… 이제 와서 파혼하자는 말만 아니면.”
“아니거든. 그러니까, 앨런.”
“말해 봐.”
“사랑해.”
그리고 무어라 더 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서 신닌이 먼저 얼굴을 붉혔다. 앨런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눈썹을 조금 찌푸리다가 입술을 뻐끔거리고는 얌전해졌다. 그 또한 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온후한 침묵이 결혼식장 안을 감돌았다. 열린 문밖에서 싱그러운 향내를 품은 바람이 허공을 미끄럽게 가로지르며 한없는 고요를 조각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해.”
“그래.”
“맞아.”
“사랑해.”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리라. 유일한 증인인 서로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있으니.
하지만 사랑 고백에 덧붙일 유려한 수사 같은 것은, 끝까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도 느껴지지 않았고. 왜냐하면…… 이것은, 이번만큼은 마지막이 아닐 테니까.
우리는 함께 가겠지. 밤 산책도, 뜨거운 낮의 로드트립도, 난폭한 사건에 휘말리는 것도… 이제부터는 작정하고 함께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확신을 쥐고 싶었고 그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가족이 되는 것.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 전과는 다른 차원의 바닥을 밟고 선 것만 같은 불가해한 안정감에 자꾸 웃음만 나왔다. 배우지 못했는데 느낄 수가 있구나. 이렇게 확실하게… 둘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