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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ㅋ님

나사르 본주 2022. 2. 11.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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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시 한 켤레 잣는 곳

능시

1. 물이 얼어서 굳어진 물질 

 

고적한 풍경 위로 불그스름한 노을이 드리우고 있었다. 퍽 높은 지대인지라 간간이 귀가 막혔고, 에이드리안은 침을 삼켜가면서 눈을 밟았다. 두꺼운 옷을 입고 왔건만 시시때때로 침범하는 찬바람이 바늘처럼 살을 갈퀴었다. 그래도 좋은 날이었다. 이처럼 맑은 황혼을, 종말보다는 아침을 연상케 하는 저녁을 맞이할 수 있는 건 이곳뿐이었다. 굳이 알프스령을 택한 이유가 절반쯤 살아나는 듯했다.

아리아는 춥다면서도 따라와서는 작은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으레 깨끗한 눈을 보면 하듯이. 물끄러미 보던 에이드리안이 같이 주저앉아, 아리아가 입은 토끼털 망토 목깃을 여며주고 손모아장갑에서 눈을 털어 주었다. 추위와 낙조로 발갛게 열이 오른 아리아의 얼굴은 이곳에서 살던 사람이래도 믿을 만큼 어울리는 꼴이었다. 사람보다는 요정, 요사스럽고 신비한 존재에 가깝게 생각되었지만. 에이드리안이 말했다.

여기, 물소리가 들려.”

…….”

아리아는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 고지대에서, 에이드리안의 말처럼 물이 흐르는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물론 깊은 바닷속에 있는 듯이 귀가 먹먹하긴 했다. 거기에 크게 불쾌하진 않더라도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것만큼의 영향은 받을 것이라고 아리아는 생각했다. 에이드리안이 헛된 말을 할 리는 없으므로 아리아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들어갈까? 커피포트 있던데.”

그래. 더 있다가는 얼어 죽겠다.”

이런 엄살도 예상치 못한 지점물소리라든가, 먹먹한 고막이라든가에서 기인한 거겠지. 아리아는 덜 만든 눈사람을 두고 벌떡 일어나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드리안은 밟혀서 뭉개진 점토 같은 눈밭을 보다가, 아리아의 손을 잡고 찬찬히 따랐다.

별장은 작았지만, 추위에 충분히 대비해두어 창문이 덜컹대거나 냉기가 훅 끼치는 일은 없었다. 일찍이 내려둔 짐가방에서 컵을 꺼낸 아리아가 초콜릿 봉지를 뜯어 부었다. 알알이 작은 초콜릿 방울들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머그잔에 쏟아졌다. 우유를 데우고, 물을 끓이는 건 에이드리안의 몫이었다. 별장을 빌린 여행객을 배려한 건지 찬장에 원두 가루가 채워져 있었다.

마트에 산 것처럼 봉지에 상표가 선명했지만, 이런 곳에서는 맛보다야 온기가 중요한 법이다. 가볍고 내구성 좋은 여행용 양철 컵 대신, 고집스럽게 가져온 하얗고 깨끗한 머그잔이 제구실을 했다. 낯선 집에서 비루한 조난보다는 훨씬 여행 같은 기분을 낼 수 있었으니까.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진한 초콜릿에 얼굴을 비추어 보던 아리아가, 열기가 닿았는지 눈을 깜빡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자연스럽게 그의 고개를 들게 해서 눈물이 맺히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해보니 사진상으로 확인한 것보다 좁은 숙소였다. 침대도 하나뿐이었고그게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불편한 잠을 재워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에이드리안은 생각했다. 아리아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그냥. 불편하지 않은가 해서, 작잖아.”

집이? 아니면 내가?”

……상충하는 답변인데. 이 집은 작지만, 너도 작으니까 괜찮겠지.”

아리아가 슬쩍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그제야 손을 거두고 빠르게 식어가는 커피를 마셨다. 아무리 난로가 있다고 한들 보온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했고. 케케묵은 게 분명한 저 벽난로를 켜야 하나, 노려보는데 아리아가 장난스레 말했다.

네가 내 생각 했다니 좋네. 여기에는 아무도 없잖아.”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이렇게 높고, 춥고, 해가 지는 곳에서 네가 내 생각을 했다는 게 좋아서.”

에이드리안은 그런가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는 타지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자기 자신은 장소에 크게 구애받는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면 생각해준 거겠지. 그것을 유념하기 시작하자 어쩐지 기이한 기분이었다.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미미하게 낯을 찡그렸다. 귀신같이 알아챈 아리아가 컵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이는 게 보였다. 눈을 감아가면서. 길고 흰 속눈썹이, 창문을 타고 들어온 석양을 맞아 더할 수 없이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실지도 모르겠다고 에이드리안은 생각했고 그러느라 잠시 들려오는 것을 잊어버렸다. 해가 지면 캄캄해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에이드리안은, 이 순간이, 비록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길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저 눈꺼풀을 보는 찰나만큼은 완전한 장막이 귀를 감싸주는 기분이었으므로.

하지만 물은 계속 흘렀다. 눈을 뜬 아리아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에이드리안은 컵이 기울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다가온 두 손이 귀를 막아 주었다. 먹먹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얼음이 녹아서 무너지나 봐. 하지만 여긴 바다가 아니야. 호수도저 물이 닿으려면, 아직 멀었어. 여긴 굉장히 추우니까어쩌면 가다가 얼어붙어서 고드름으로 맺히기만 할지도 몰라.”

느리고 조곤조곤한 말투는 자장가 같았다. 분명 누군가를 달랠 때 쓰는 목소리 같았지만, 아리아의 발성은 원래 이랬다. 이것이 자신을 안도케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에이드리안은 생각했다. 가슴께의 두근거림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만 몇 모금 마신 커피의 각성효과가 돌아 물소리 대신 피가 도는 섬약한 감각이 머릿속을 메웠다.

아리아의 입술은 붉었다. 에이드리안은 입을 맞추었다. 추위와 온기를 지나쳐 조금 말라붙은 입술의 가슬가슬한 느낌, 금세 젖어 들어 부드럽게 맞물리는 살갗. 목덜미를 감싸 쥐어도 아리아는 피하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잇가에 쓰디쓴 초콜릿 맛이 닿는 걸 느끼고 입을 벌렸다.

아리아는 그것도 거부하지 않았다.

코끝이 스쳤다. 몸을 일으키며, 윗입술을 짓누르듯이 핥는 기세에 아리아가 입술을 살짝 벌리며 따라붙어 왔다. 이를 세워 지근지근 씹는 게 느껴졌다. 내가 간식이라도 되나에이드리안은 웃고 싶었다. 몸이 따스해졌기 때문이었다. 단지 등 뒤를 데우는 녹은 햇빛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호흡이 섞여 숨이 습윤해질 때쯤에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물렸다. 아리아가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가 농담을 던졌다. “이런 거 할 줄 알았어?” 에이드리안은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떨어져나왔다.

커피가 다 식어 있었다. 저어서 마셔야 할 만큼 진한 초콜릿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고 보니 입안에 맴도는 씁쓰레한 맛은, 아리아에게서 옮겨 온 것이 아니라 원두의 풍미였다. 슬며시 핥아본 젖은 입술에서는 단맛만 감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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