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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ㅁ님

나사르 본주 2021. 10. 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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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불온한 나날이었다. 시월 초순부터 북부에는 이미 눈이 내렸다는 괴괴한 뉴스가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서리가 내려 농사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이번 할로윈에는 호박이 없을 거라느니 하는 농담도 돌았다. 갑작스레 수그러진 여름날에 사람들은 기민해지고 겁먹었지만, 에이르 일리아나에게는 썩 괜찮은 일이었다. 그는 밤사이 내린 눈을 맞지 못해 불만인 얼굴로, 소파에 앉아 조간신문을 읽었다.

불공평해. ……그렇지? 에일라.”

에일라는 에이르를 무시했다. 에이르는 빙긋 웃으며 다시 신문 일 면을 보았다. 타블로이드지가 그렇듯 별거 아닌 일을 경악에 휩싸인 문장으로 과대 포장해 놓았고 행간에서는 느끼한 피로도가 느껴졌다. 이상기후는 일면 아래쪽에 조그맣게 나 있을 뿐, 주요한 소식은 중견 배우의 스캔들이었다. 대문짝만한 파파라치 사진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이르는 신문을 어슷하게 접어 식탁에 툭 내려놓았다. 그가 애교스럽게 말했다.

눈사람 만들 정도는 아녔나 봐. 길이 다 마른 걸 보면.”

비를 뿌린 후 차가워진 날씨에 빙판이 얼지 않도록 길거리에는 모래나 염화칼슘을 뿌린 흔적이 낭자했다. 얼음과 눈송이는 금세 녹아버려, 이제는 거무스름하고 축축한 얼룩 주변에 희끗희끗한 빛깔이, 또는 까슬까슬한 모래가 깔려 있었다. 겨우 이 정도에 난리라니. 에이르는 하품을 하고서 기지개를 쭉 켰다. 일어나자마자 내린 드립커피가 식어버렸는지 김이 엷었다.

그는 하늘색 광택이 도는 흰 실크 파자마 차림이었다. 한 쌍을 구매한 것인데, 장롱 안에 곱게 개어 두었더니 에일라가 입기 시작했다. 물론 에이르는 영리했으므로 다시는 장롱 서랍을 열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옷을 에일라가 꺼내 입은 것, 그게 진실이었다.

에일라는 말이 없었고, 간혹 차갑게 굴었다. 지금처럼. 저렇게 매일 아침 내려주는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에이르는 하는 수 없이 부드러운 갈색으로 링이 생긴 커피잔을 개수대에 내려놓고 물을 부었다. 그는 유한 빛깔의 거품이 넘치다가 투명하게 흩어지는 걸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대리석으로 지은 아일랜드식 식탁에 기대었다.

에이르는 눈을 감고 냉기를 느꼈다. 손에 닿아 있는 것이 시야에 선했다. 흐르는 우유처럼 아로새겨진, 뿌옇고 하얀 무늬를 제외하면 어떤 검은 반점도 존재하지 않겠지. 그는 눈을 떴다. 다시금 빙긋이 웃고 있었다. 에일라가 말했다. 무슨 생각 해.

너에 관해 생각하고 있어.”

누나는 언제나 그렇지.

알면 고마워해주라.”

이렇게, 배은망덕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그는 잊지 않았다. 에일라는 묵묵히 대답을 들을 뿐 그 냉랭한 표정을 달리 바꾼 적이 없었다. 에이르는 동생의 파란 눈을 쭉 들여다보면서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에 너는 폭발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지,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다양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입을 막는 순간에는 턱을 달달 떨며 나를 밀쳐내지도 못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에이르가 시답잖은 말을 몇 마디 더 하려고 하는 차에, 초인종이 울렸다. 그가 입술을 살짝 벌리며 갸웃했다. 오늘은 일정이 없는데. 순회공연을 막 끝낸 다음 주차의 일요일이었다. 복도마다 깨끔한 냄새가 감도는 오피스텔에 사탕 장난을 칠 어린아이가 산다고는 들은 바가 없었다. 사탕이 준비되어있긴 했다만, 그냥 분위기 내는 용도지.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단 둘뿐이어서 별다른 명절을 지내지 않는 에이르와 에일라에게는 이런 기분이 필요했다.

조잡한 플라스틱 호박 바구니에 담긴 사탕 하나가 파스락거리며 떨어졌다. 에이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먼저 문을 열러 갔다. 에일라는 여전히 바른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동생을 흘끗 보고 핏 웃으며, 에이르가 문고리를 밀어 열었다.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났고거기 에일라가 있었다.

에이르는 어리둥절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에일라가 있었다. 앞을 보았다. 에일라가 있었다. 의문이 공포로, 공포는 반가움으로, 다시 불안감으로 변질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둘이 된다면 어떨까?

(그게 사실은 내가 죽인 사람이라면?)

에이르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닫힌 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발코니 바닥을 수놓은 모자이크와, 희고 부드러운 석조 난간 위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지만 그는 어쩐지 거기로 움직이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에이르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문밖의) 에일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 반가워.” 그러자 (문밖의) 에일라는 이제 들어갈 수 있다는 듯이 어깨에 힘을 풀고는 초대받은 손님처럼 에이르의 몸을 밀고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이 쌀쌀한 모양인지 동생의 몸이 무척 차가웠다. 에이르는 여전히 멀건 시선으로 짙푸른 타일 틈새가 반짝이는 창문 너머와, 동생()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동생들이 빈백과 스툴에 앉아 이 미터쯤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 보았다. 소름 끼치도록 닮아있었고 문득 에이르는, 닮은 게 아니라 똑같이, 그러니까 완벽하게 복제한 것처럼 같은 인간이 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일리아나가 둘 이상인 건 그 일 뒤로 처음이었다. 이제, 에이르는 기존의 질문을 번복할 필요성을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둘이 되었다. 그것뿐…… (이래도 되나?) 돌아온 에일라는 퍽 감성적인 편이었다. 지금도, 스툴에 걸터앉은 채, 에이르의 시선을 피하며 뺨 언저리에 땀방울을 묻히고 있었다. 가여운 것. 뛰어온 게 분명했다. 단 하나뿐인 누나를 만나러.

에이르. 에일라들이 말했다. 목소리가 완벽하게 같았고 기이할 만큼 포개어져 있었다. 에이르는 생각했다. 한쪽을 다른 한쪽이 따라 하는 걸까, 내가 한목소리를 상상하고 있는 걸까. 그러니까, ‘진짜는 한쪽일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래. 둘 중 하나는 거짓이다. 우리는 서로가 하나 뿐이기에 소중했다. 누나, 연주해 줘. 에일라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에이르는 문간에 놓인 플루트 케이스를 열고 악기를 꺼냈다. 어릴 적에 연습용으로 쓰던 물건이었다.

에일라가 일어서서 오디오를 켰다. 음량이 올라가자 피아노 선율이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무겁고 진중한 음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에이르는 긴장인지 흥분인지 모를 짧은 숨을 들이켠 다음 입가에 플루트를 댔다. 질이 낮은 기명악기의 둔탁한 음색이 슬그머니 흘러나왔다.

드뷔시의 달빛이었다.

높이 떠오른 정오의 해가 볕을 뿌렸다. 에일라가 발코니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훅 끼쳐왔다. 극단적으로 높은 명도와 반대급부로 얼어붙은 공기가 얇은 옷깃을 자르며 에었다. 눈송이가 뺨에 달라붙어 스르르 녹았다. 드문드문 눈이, 벌건 대낮에 레이스 같은 보드라운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쉬폰 커튼이 휘몰아쳐 에이르를 잡아먹었다.

에이르는 눈송이 하나와 자기 자신이 같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가슴을 끝까지 내밀었을 때처럼 어깨 부근이 당겨왔다. 날개가 돋는 것 같았다. 깃이 없고 뼈만 남아 자라는 날개가 어린 고사리처럼 서서히 등을 폈다. 살갗을 찢는 고통이 일어 은빛 플루트의 음률이 삐걱 흐트러졌다. 그는 그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이 시렸다. 눈물이 얼어붙은 볼을 가로지르느라 식어 빠진 채 닫힌 옷깃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발코니였다. 두 다리 밑에는 에일라가 깔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는 얼굴이었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 다른 사람 같았다.

하늘이 불온한 나날이었다. 거기에서 떨어진 빛살이 아름다운 칼처럼 눈동자를 도려냈다. 에일라가 눈을 감는 것 같았다. 에이르는 처음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를 기분을 느끼며, 희게 질린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야가 떨리는 건지 손가락이 떨리는 건지. 악기는 거실 한쪽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음악이 끝나, 스피커에서는 웅웅거리는 공회전 소리가 났다.

죽은 것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바닥의 모자이크화가 그 얼굴로 옮겨붙은 듯이. 테라스 위로 점점 더 많은 눈이 내렸고, 더 많은 눈송이가 녹아내려 무릎이 축축했다. 시신을 여기에 두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알지만, 따뜻하고 어두운 곳으로 데려갔다가는 더 빨리 부패해 영영 못 알아볼 것 같았다.

등 뒤로 다가온 에일라가 허리를 굽히는 것이 그림자로 보였다. 그 애가 물었다. “어때?” 어떻냐니, 다급하게 고개를 든 에이르는 비명을 삼켰다. 에일라의 얼굴이 유령처럼 모호해져 있었다. 에이르가 서둘러 일어서서, 동생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가 눈물을 뚝뚝 떨구는 낯으로 웃었다.

이제 다 괜찮아.”

그래, 괴물이 들어온 거였다. 오늘은 망자들이 활개 치는 날이어서 어떤 괴물이 장난을 친 것이다. 집에는 사탕이 있고 거미줄 친 방과 싸구려 호박 바구니도, 새 잠옷도, 그리고 나도 있으니까……. 너는 그냥 여기로 와서 흰옷을 입어주면 되는데.

에이르는 뒷걸음질 쳤다. 발에 와작, 하고 소름 끼치게 시린 눈덩이라 밟혔다. 서둘러 뒤돌아보자 눈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눈코입에 박힌 것 없이 손가락 구멍만 낸 허섭스레기였다.

어때?”

에일라가 물어왔다. 무너진 눈사람의 머리는 동떨어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칼이 세 대나 박혀 있었다. 선혈이 묻어 칼날들은 아름다운 붉은 색이었다. 빛깔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여긴 너무 밝다, 에이르는 중얼거렸다. 울음을 그친 얼굴이 반짝이며 눈물길을 피력하고 있었다. 이제야 느낀 것인데 몸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안에서 본 것보다도 날은 몹시 추웠다. 에이르는 도망치듯이 창문 안꼍으로 달겨들었다. 포근한 슬리퍼가 벗겨지고, 손에 묻은 물기가 꽃무늬 패브릭 소파에 점점이 번졌다.

고개를 떨구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에이르는 불현듯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가 빙긋 웃었다. 창문을 닫은 뒤 커튼을 치던 에일라를 향해 돌아섰다.

손에는 아직 냉랭한 체온과 얇은 살이 밀리던 느낌이 남아 있었다.

에일라가 비뚤게 미소 띠었다.

듣고 싶은 거 있어?” 에이르가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 에일라가 나긋하게 대답했다. 그저 이렇게 있자고, 그 애는 말했다. 에이르는 한쪽 발을 깨끔하게 들었다.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있어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에일라는 음반이 놓인 곳으로 다가가 스피커를 껐다. 잡음조차 없는 완전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눈송이처럼. 뼈를 무너뜨리는 소복한 깃털처럼. 에이르는 숨이 막혀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숨죽인 흐느낌이 얄팍한 베일처럼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것만은,

눈물만은 여전히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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