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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날카로울 만치 명료했다. 여덟 시간을 선 채로, 자정까지 로테이션 근무를 한 경력의 실버에게는 종일 연구실에 앉아 사무업무를 보는 정도는 가벼운 하루에 불과했다. 토요일에도 출근해서 최신 논문을 내려받아 읽다가 한밤을 맞이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실버는 눈이 아파 잠시 감았다 뜨고, 내려놓은 커피를 입에 댔다가 차가운 온도에 놀라서 멈칫했다. 이미 해가 져 블라인드를 쳐둔 실내는 아주 어두웠다. 스마트폰에 뜨는 시각은 열 시 팔 분이었다. 실버는 잠시 입을 살짝 벌리고 멍해졌다. 잠시 후에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이 약간은 짜증스러웠다.
에스텔이 기다리고 있겠지… 자리를 정리하려고 주섬주섬 일어나던 실버는, 문득 연락을 먼저 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기를 들었다. 연결음이 두 번도 지나지 않아서 에스텔이 받아들었다. 졸린 목소리가 들렸다.
- 실버?
“에스텔. 아직 안 잤어?”
- 응… 이제 자려고. 언제 와?
“곧 갈게. 먼저 자고 있어.”
- 실버.
응, 하고 실버가 부드럽게 대답했지만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겉옷을 걸치던 실버는 그대로 멈추어 대답을 기다렸다. 블라인드 틈새로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추정되는 짧고 부연 빛이 들었다가 빠져나갔다.
영상통화 해 줘, 에스텔이 투정 부리듯이 중얼거렸다. 실버는 곧장 영상 버튼을 눌렀다. 따스한 스탠드 조명 불빛과 프릴이 달린 이불을 덮은 얼굴이 졸린 듯이 눈을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쌍꺼풀이 진 커다란 두 눈동자와 눈꺼풀이 엷은 주황색으로 빛나는 걸 보며 실버는 나직이 웃었다.
일은 다 했느냐고, 에스텔이 물었다. 실버는 가느다란 죄책감으로 가슴이 조여오는 걸 느꼈다. 욕심껏 공부하느라 반려를 집에 내버려 둔 탓이었다. 시간을 짜내어 집중하는 버릇은 입시를 할 때부터 고쳐진 적이 없었다. 느긋하게 구는 법을 모르는 삶이었으므로. 이제는 가족에 시간을 써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의식지 않으면 이렇게 딴 데로 나돌아버리는 것이었다.
“응, 내일은 집에만 있을 거야.”
- 잘 됐다. 내일… 미술관 가자.
“영화도 볼까?”
- 응…….
돌이킬 수 없이 졸음을 쏟는 목소리로, 에스텔은 연방 웅얼거리는 것처럼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눈을 뜨고 있으려 안간힘을 쓰고 휴대전화를 꼭 붙들고 있는 것이 귀여웠다. 겉옷을 팔에 걸고 바깥으로 나온 실버는, 코끝에 물방울을 묻히고서야 우산을 놓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한번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인제 와서 돌아가면 귀가가 늦어질 거라는 조바심이 들어, 실버는 그냥 빗속을 뛰었다.
- 어어, 비 내린다.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헐떡거리면서 실버가 운전석에 앉았다. 에스텔은 잠이 좀 가신 눈매로 웃었다.
- 너무 서두르지는 마. 사고 날까 봐 무서워.
“알겠어. 그래도 빨리 갈게.”
- 서두르지 않고 빨리?
“안 서두르고 빠르게.”
작은 웃음소리. 실버는 전화를 끊는 대신 거치대에 전화기를 놓았다. 차 지붕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통화음에 그대로 섞여 들어갔다. 에스텔이 자세를 고치며 엎드린 듯 음영의 각도가 달라졌다.
토요일 저녁인 터라 도로가 좀 막혔다. 자차보다도 오토바이나 택시들이 더 많았다. 이 날씨에 배달을 달리는 청년들을 흘끔 본 실버는, 다시 에스텔을 보며 웃었다. 에스텔이 앞을 보라고 핀잔을 주자 입을 꾹 다물고 짐짓 정면을 주시하는 체하면서.
그러고 보니 이런 적이 몇 번 있었다. 사무실에 쌓인 삼단우산의 개수를 헤아리던 실버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다음부터 정신을 두고 다니지 않으면 될 일이다. 에스텔이 얼굴을 베개에 묻고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다. 불편할 텐데… 실버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에스텔을 불렀다. 깨어나지 않았다.
어쩌지, 눈썹과 미간을 문지르며 와이퍼가 돌아가는 걸 보던 실버는 결국 통화를 끊지 않기로 했다. 종료음이 비정하게 들릴 수도 있으니까. 본래도 실버는 먼저 전화를 끊는 일이 잘 없었다.
“잘 자.”
실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에스텔이 잠결에 으응, 하고 대답을 하는 게 들렸다. 웃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했다.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지 모르니.
집에 가면 씻고 영화를 찾아봐야지. 다시는 주말에 일 생각을 하지 말자, 그는 다짐했지만, 다음에 어쩔지는 모를 일이었다. 에스텔은 날을 잡아 종일 함께 있으면 충전이라도 된 듯이 다시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을 기억해내자 실버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집으로 가까이 갈수록 빗줄기가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