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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한 촛농이 굳을 때
에스텔이 읽을 것 같지 않은 두꺼운 소설 두 권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새로 산 티가 나는 게, 선물 받았거나 어디선가 로맨스 영화를 보고 원작을 산 게 분명했다. 펼쳐보니 가름끈은 첫 십몇 페이지에 멈추어 있었다.
깊은 곳까지 언 호수에 눈을 댄 듯 시리도록 푸른 끈의 질감이 실버의 마음을 앗아갔다. 실버는 얼마 전에 함께 본 영화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어쩌면 그런 내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기이했지만 사랑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였지. 서로를 잊지 못하는 연인이란 주제여서, 실버는 에스텔을 보는 것도 잊고 꽤나 몰입했었던 것 같다.
그저 가벼운 예감이긴 했지만 이끌린 김에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침 일독하던 시집을 몇 번 재독까지 마친 후였다. 필사해둔 노트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실버는 에스텔의 책을 꺼내 거실 소파에 앉았다. 대낮이면 빛이 차르르 드는 자리였다.
<안나 카레니나>
그러고 보니, 이런 제목의 영화가 두어 편 있었던 듯한데… 에스텔을 만나기도 전에 보았던 작품이었는지 제목조차 생소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간 그땐 보고 싶어서 보았다기보다야 무어라도 채워야만, 마음에 깃들어야 해서 되는대로 삼키던 시절이었고 비디오를 넣고 잠이 들어 새벽까지 돌려놓기도 했다. 빼는 걸 잊어버려 테이프가 다 늘어져서는 대여점에 물어주어야 했던 기억이 났다.
흑백영화였지, 실버는 희미한 뇌리를 헤집다가 그만두었다. 새로 편 종이 첫 장이 무척 매끄럽고 고급스러워서 놀란 탓이다. 첫 문장은 퍽 길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실버는 자기 불행의 이유를 사유해오는 걸 피해왔고, 따라서 이 문장은 잘 벼려진 칼날 등을 어루만지듯 서늘했다.
그는 불안과 같은 끌림을 느끼며 책장을 느꼈다. 길고, 건조하고 설명적인 어투의 번역체는 소설에 익숙지 않은 실버에게는 낯설었고 타향의 낯선 나그네를 구경하는 것처럼 멀게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실버의 이야기였다. 대두되는 세 남성이 아닌 안나 카레니나의 인생은 욕망과 삶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의 소년 시절을 연상케 했다.
실버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에스텔이 딱딱하게 굳어 부서질 것 같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에는 아기곰이 그려진 따스한 머그를 든 채였다.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한 에스텔이 환각이 아니라는 건 머그에서 폴폴 피어오르는 김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옅은 수증기가 어느새 각도를 바꾸어 쏟아지는 햇빛에 무너졌다.
에스텔은 컵을 떨어뜨리며 실버의 손에서 소설을 앗아가려고 했고, 쏟아지는 뜨거운 음료에 에스텔이 데였을까 놀란 실버는 외려 책을 든 손을 뒤로 당겨버렸다. 에스텔은 자기가 실버의 품에 안긴 줄도 모르고 바동거렸다.
“에스텔? 왜, 왜 그래?”
실내복 치마가 젖히며 드러난 맨다리에 뜨거운 김이 닿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실버는, 에스텔이 원하는 대로 책을 건네주었다. 아끼던 물건이었나 싶었다. 중요한 사람에게 선물 받은 건지도 모른다. 에스텔은 예전부터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화사한 성격이었으니까, 어쩌면 실버가 모르는 스승이나 친구가 있을지도.
두껍고 푸른 양장서를 받으며 에스텔의 가느다란 손목에서 힘줄이 빛나는 듯했다. 그저 아름다워 잠시 넋을 놓았던 실버는 에스텔이 쥐어 짜낸 한 마디에 정신을 차렸다.
“읽으면 안 돼!”
에스텔은 책을 보호하듯이, 아니 어린 양에게서 독이 든 열매를 빼앗는 것처럼 그걸 끌어안았다. 실버는 잠시 빛 속에 선 그녀에게 경탄스러운 감정을 느꼈지만 꾹 참고 모르는 체 물었다.
“왜? 야한 장면이라도 나와?”
고전 소설에는 으레 그런 불순한 장면이 나온다. 고전보다도 현대 단편소설을 더 좋아하는 에스텔에게는 낯설지도 몰랐지만, 실버가 펴보는 책이나 영화에서는 드문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실버는 미성년 관람 불가 영화를 켤 때마다 에스텔의 귀 끝이 긴장으로 빨개졌던 걸 떠올리면서 웃었다. 그럴 때마다 어쩐지 여유로워지곤 했던 실버는 이번에도 장난스러운 기분일 따름이었다. 저렇게 불안해할 것까지야 없지 않나.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러자 에스텔이, 갑작스럽게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실버가 당황해선 몸을 앞으로 빼고 손을 뻗었다. 볼썽사납게 붉어진 눈가를 가만 짚어주는 실버의 손길을 받으면서, 에스텔은 눈을 살짝 감았다. “그게 아니라…….” 그녀가 말했다.
“이 주인공은 결국 자살한단 말이야.”
숨도 끼지 못하고 내뱉듯이 발화한 언어가 실버의 가슴 언저리에 지나치게 예리한 눈송이처럼 얹혔다. 그렇군. 그는 생각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에스텔은 날 위해.
저렇게,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다. 병원에 가 있어 보지 못한 동안─그녀는 아마 많이도 울었을 것이다. 새삼스러운 생각에 실버는 잠깐 멍해졌다. 자기 자신을 치장해 별거 아닌 듯이 행세하느라 되려 에스텔을 돌아보지 못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실버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어떤 짓이든 저질렀으리라. 매일 밤 뜬눈으로 날을 샜을 것이다.
아무리 에스텔라스, 성격 좋고 밝은, 수없이 사랑받은 그녀라고 해도 결국에는 인간이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버거워했던 지난날들이 다만 수치스러웠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 먼 미래에조차 허용되지 않는다고, 설사 누군가에게 정을 붙인다 한들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매도해온 기억이 아스라하게 떠올랐다. 이미 오래된 일인 것만 같았지만 실은 일 년쯤 지났을 뿐이다. 그간 에스텔은 계속 마음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실버가 이 모든 걸 놓고 도망칠까 봐.
상처 입고, 상처입히고,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그만두자고 할까 봐.
그러나 이 순간 실버 그레타는 깨닫는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에스텔을 놓아줄 수는 없었다. 설령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어도, 그 사실을 무덤까지 비밀에 부친 채 꾸역꾸역 옆에 붙어 있고 싶었다. 이 욕망은 추악했지만 그만큼 생동력을 갖고 있어서, 실버는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괜찮아.”
침묵이 지나고 실버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에스텔은 입술을 꼭 물고 있었다. 믿지 못하는 것처럼.
“괜찮아, 나는.”
말하며 에스텔의 품에서 책을 살며시 빼 오자 힘없는 두 손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굳이 빼앗지 않았어도 떨어뜨려 발등을 찧었을지 몰랐다. 에스텔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어왔다.
“정말로?”
“진심으로. 그나저나, 아직 몇 장 못 읽었는데 스포일러를 했어.”
“……미안!”
무엇이랄지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사죄였다. 에스텔이 실버의 품에 마구 안겨서 구겨졌다. 에스텔을 무릎 위에 앉힌 실버는 함께 책장을 폈다. 모든 행복은 비슷하다니.
그럴 리 없다, 고 실버는 생각한다. 모든 불행의 가짓수가 사람마다 다른 만큼 그것을 극복한 인간의 행불은 그보다 많은 것이다. 품에 안고 있는 에스텔의 촉감, 머릿결에서 풍기는 강한 향기, 그녀의 손끝을 모아 입 맞출 때마다 느껴지는 차디찬 돌가루 같은 물감 냄새, 무릎 위에 얹힌 무게와 부스러질 것처럼 약한 소리를 내는 옷감의 감촉을 모든 사람이 알 리가 없다. 이것은 단지 실버 그레타의 행복. 그가 죽고 싶지 않은 이유.
긴 프랑스식 창가로 들이치던 햇빛이 어느새 조금 기울어져 있다. 안락의자에서는 부드러운 섬유탈취제 향기가 난다. 자주, 오래 앉아서 쓰다듬는 습관 때문에 부드럽게 닳아가는 호두나무 팔걸이와 마호가니로 만들어 유리를 덧댄 책장이 한눈에 보인다. 덜 마신 커피잔에서 식어버린 수증기 냄새가 피어오르고 에스텔은 여전히 뽀얗고 미소가 어울리는 얼굴로 자신을, 오직 실버만을 바라보고 있다. 창 바깥에서 겨울눈이 벌어지기 시작한 목련 꽃가지가 엇박으로 이쪽을 두들긴다. 창문을 열면 금세라도 세상이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다.
이 사치스러운 삶을 원하고야 만다. 그러한 막중함에 마음 한구석이 하얗게 질리기도 했지만, 그깟 기분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실버는 그레타의 어린 시절, 집을 뛰쳐나오기 직전 마음먹었던, 까맣게 불탄 삶에의 욕구를 상기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생존이 전제된 사랑이라니 이 어찌나 호화로운 만찬인지.
긴 테이블 끝에서 에스텔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실버는 일어서서, 접시를 짓밟으며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괜찮으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 에스텔. 난 죽고 싶지 않아.”
실버가 속삭였다. 에스텔이 어리광부리듯이 몸을 뒤챘는데, 실버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걸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웃고 싶은 기분일 테다. 실버가 그러한 것처럼.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았던 고통이 희미해졌다. 오래전의 기억은 희석되고 변형되어 에스텔의 손끝에서 바스러진다. 오직 이 순간만이 귀중하여, 지금 말하지 않으면 소용없을 것 같은 한 마디가 있다.
“같이 살자.”
실버가 말했다. 품 안에서 풋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났다.
그 조그만 소리 한 줄기로, 실버 그레타는 살아갈 수 있었다.
나 이제 아무것도 견디지 않을 거야. 버티고 부러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는 살지 않을 거야. 네게 기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주저 없이 소원을 말할 거야. 실은 가지고 싶은 게, 잃고 싶지 않은 게 더 많았다고. 잃어버린 촛대보다도 긴 목숨을 바라왔다고. 매일 파고드는 통증 속에서 나아지는 날만을 기다려왔다고. 네 부드러운 손바닥을 한없이 원했다고.
아플 때 침묵하지 않을게, 사람을 믿지 못하는 습성의 날짐승처럼은 묵묵하지 않을게. 이겨내려고 하지 않을게. 다만 네 어깨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고 가끔은 투정도 부릴래. 우리의 머리가 맞닿을 때 확 이는 불티 같은 사랑을, 손이 델까 두려워 피하지 않을래.
사랑만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고 착각하지 않을게.
이 모든 게 네 덕분이라고 짐을 지우지도, 너 때문이라고 돌변하지도 않으면서, 넘기고 싶은 책장처럼 내일을 생각하고. 그러니 네가 고통스러운 순간 나는 가장 강해질 거야…… 에스텔, 난 이제 살아온 모든 날을 용서할 수 있어.
네가 한마디만 한다면.
아침에, 창문을 조금 열고 잠이 든 열대야의 밤이 지나고 난 뒤, 땀에 젖었다가 마른 이마를 비비면서 네가 웃고, 이렇게 말해준다면.
“사랑해.” 에스텔라스 그레텔이 말했다.
벌어진 상처래도 숨을 쉬도록, 햇빛을 보도록, 습윤한 회복기의 상태가 계속되도록. 아프지 않은 날들은 없겠지만 네가 없는 나날을 상상하지도 않으면서.
기꺼이 살아보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