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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풀 드림
THEATER the BENEFIT
둘은 한가롭게 세탁방에 앉아 있었다. 층을 나누어 얹은 세탁기들과 치열한 경쟁 끝에야 취할 수 있는 몇 대의 건조기를 바라보며 그는 턱에 손가락을 대었다. 곁에 앉아 있던 타이트한 복장의 큐트한 남성이 꽤나 섹시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텍스트 연출로 이러는 거 심하지 않아?”
“내가 뭘 했다고, 자기야.”
“내가 타이트한 수트 차림 큐트한 남성인 건 맞지만… 너 지금 세탁기에 사람 넣고 돌릴 생각 하는 거 다 아는데?”
“그러면 안 돼?”
“그러고 나서 나한테 뒤집어씌운 다음 가오 넘치는 내 스릴 액션 즐기려고……”
“스포일러 당했어.”
320이 말을 끊자, 데드풀이 불만스러운 듯 눈가를 일그러뜨리면서 턱을 괴었다. ‘이런’ 옷만 입기는 하지만 자신의 청결하고 쁘띠한 속옷이라거나 가끔 사는 후드티를 위해서라도 빨래를 돌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너저분한 집안에 그럴듯한 라운더리가 딸려 있을 리 없으므로─그는 최대한 상냥해 보이는 미소로 코인세탁소에 들르는데, 달에 한 번꼴인 그런 때마다 어째선지 주변에 사람들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그냥 빌런같이 생겨먹어 그런가 했는데 범접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320이 곁에 있기 때문이라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리고 지금 막 창 바깥으로 포멀한 차림의 금발 벽안 백인 젊은 엘리트 남성이 지나가고 있다. 속성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걸 보아 320이 모브를 만들어 저기에 처넣고 싶어 할 거라는 것 정도는 유추 가능했다. 모브는 회사에 가야 하는데 같은 곳만 뺑글뺑글 돌고 있는 게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손목시계를 안쪽에 찬 캐릭터였다. 전직 군인 요소 넣은 거냐고? 당연하지.
데드풀은 320의 엉큼한 미소를 무시하고 싶었다.
그게 됐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데드풀이 투덜거린다.
보통 이런 라운더리에서는 코믹한 로맨스, 자연스러운 마주 침, 생활감이 묻어나는 내추럴한 요소가 가미되어야……, 시발 이거 뭐야?
320 이런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해봤어.
이브 이편이 좋은가, 윌슨?
윌슨 아니.
윌슨 (수트 뒤 꽁지 쥐어뜯으며) 썅. 이걸 하나라고 해야 해 둘이라 해야 해?
320 문법에 익숙해지려무나. 자기, 이건 무대를 전제한 희곡을 본 뜬 소설이라구.
데드풀, 무대 중앙 벤치에 앉아 있다. 코인세탁소에 흔히 놔둘 법한 야구장 관중 벤치다. 알록달록한 색을 메탈스프레이로 보완해 싸구려 티가 난다. 데드풀 양옆에는 이브가 앉아 있다. 뒤에서 320이 두 꼭두각시 이브를 조종한다.
무대장치는 단순하다. 나무로 만든 두 꼭두각시 이브는 천장에 걸려 있고, 낚싯줄 중간에 걸린 조종간을 320이 만질 수 있다. 원형무대이며 고풍스러운 침대에 쳐야 할 것처럼 야릇하게 생긴 붉은 휘장이 무대 테두리에 세운 말뚝을 기준으로 빙 둘러쳐져 있다. 마치 러브호텔 같다.
데드풀 천박해!
320 뭐가? 꼭두각시가? 원형무대가? 커튼이? 스피커 대신 돌 아가는 세탁기 아니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구현이?
데드풀 하긴 모아 두니까 당신 같은데. 아, 하지 마.
이브의 꼭두각시 1(왼)이 딱딱하고 차가운 손으로 데드풀의 뺨을 쓰다듬는다. 320의 손이 미세하게 낚싯줄을 조정하는 게 보인다.
데드풀 수트는 이럴 때 유용하지.
320 하 하. 옷이 아니더라도 감각 거의 없잖아?
데드풀 이 수트가 거의 내 피부거든? 그만 만져!
320 내가 만지는 거 아니야. 얘가 그러는 거지.
데드풀 말장난…….
320 희곡은 원리가 그래.
데드풀 코믹스 출신이면서.
320 그건 너지.
이브 1이 손을 거두자, 이브 2가 데드풀을 포옹한다. 320의 손은 멈추어 있다.
320 이게 되네.
데드풀 으아아아아.
320 그렇게까지 질겁할 거야? 응? 응?
데드풀 내가 당신들을 사랑할 필요는 없잖아, 오늘따라 왜 질척거릴까?
320 왜 없어? 사랑해줘. 사랑해줘.
320이 낚싯줄을 손에서 놓고, 데드풀의 어깨에 고개를 푹 묻는다. 이브 1과 이브 2가 데드풀을 어색하게 끌어안고 입 맞춘다. 데드풀이 소스라친다.
데드풀 어머 남사스러워라!
320 사랑한다니까. 언제까지 안 믿을 거야?
데드풀 흠, 내가 죽을 때까지.
320 한 번 더 죽고 싶은 거야? 그럼…….
데드풀 세탁기에 돌려지는 건 사양할래. 페티쉬 잔뜩 넣은 그 금 발남은 어디로 보내버린 건데? 한참 전부터 안 보이잖아.
320 갔어. 아마 세계 변두리 쪽에서 어디에도 없는 자신의 회 사를 찾으며 빙빙 돌다가 결국 도시 괴담이 되겠지. 착한 윌슨은 신 같은 거 하지 말아용. 가끔 그런 애들 마주치 면 기분이 이상해서 없애버리고 싶단 말이야.
데드풀 (320을 새삼스레 돌아본다) ……없애잖아?
320 내 말이. 몇 명째일까? 기억 안 나.
데드풀 태초의 신이라도 돼?
320 오, 아냐. 자기, 난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 그냥 시간 그 자체라고 할까.
데드풀 나 알아, 야리꾸리한 초끈이론!
320 수수께끼도 아니었지만 틀렸어. 여기서 나는 독자야. 연극 에는 관객참여형이라는 게 있더라?
세탁 끝나는 소리가 난다. 데드풀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난다. 그가 황급히 건조기를 가리킨다.
데드풀 있다!
320 건조기가 그렇게 좋아? 넣어 줄까?
데드풀 ……사고회로가 왜 그렇게밖에 안 돌아가는데?
데드풀, 세탁물을 꺼내 건조기에 구겨 넣으며 투덜거린다. 데드풀이 코인 넣는 구멍을 쾅 친다.
데드풀 젠장!
320 왜?
데드풀 동전이 없어.
320 그냥 버튼 눌러 봐.
데드풀이 반신반의하며 버튼을 누른다. 건조기가 돌아간다.
데드풀 오. 개똥도 쓸 데가.
320 말이 심하네. 저거 그냥 소품이잖아. 진짜 건조기가 얼마 나 비싼데.
데드풀 대체 돈은 어디서 나는 거야?
320 이런, 나 꽤 성실하게 근무했었다고. 자기는 그 달콤한 기 억을 전부 잃어버린 거야? …로맨틱한데?
데드풀 당신 같으면 잊겠어?
320 사랑스럽긴.
암전.
320이 데드풀의 등에 기대어 앉아서 길게 하품했다. 그가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데드풀이 얼른 정신을 차렸다.
드문드문 사람이 앉아 있는 세탁소였다. 모든 세탁기가 가열차게 돌아가고 있고, 건조할 자리가 없는 세탁물이 전용 바구니에 쌓인 채 도둑질을 막으려는 주인의 열띤 눈빛을 받고 있었다. 허름한 티셔츠와 어울리지 않는 건조 섬유유연제 향기 속에서 데드풀은 자기가 320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감촉이 둔한들 퍽이나 깜찍한 일이었다.
창 바깥으로 금발 모브가 지나갔다. 땀을 뻘뻘 흘리는 게 저 차림으로 몇 바퀴나 뱅뱅 돈 모양이었다. 데드풀은 눈썹이 있어야 했던 부분을 엇갈리게 찡그렸다.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였나? 하기야 동네에서 제일 싸긴 한데. 몸을 돌려 보니, 320의 이브의 모습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데드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대로 등짝을 내주었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잠깐. 작가가 또 무슨 일 터뜨리는 거 아니야? (데드풀이 이쪽을 노려본다. 나는 슬슬 이 소설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므로 아무 사건도 불어넣을 의지가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저기, 건조기 안 써요?”
누군가 짜증스레 물어온다. 괴상한 코스튬을 한 남성에게 말을 거는 게 썩 내키지 않는 투다. 데드풀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경찰 앞에서처럼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동전 좀 있어요?”
뭐 하는 거람, 하면서 ‘누군가’는 돌아서서 가버린다. 덕분에 건조기 자리를 빼앗겼다. 데드풀이 자기 앞에 내던져진 축축하고 세제 냄새나는 세탁물을 물끄러미 보는 동안, 건조기가 뜨거운 냄새를 풍기면서 동작한다. 너도 참 구질구질한 인생이구나. 24시 라운더리 따위에나 비치되어 있고. 나는 기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말을 거는 처지고. 사실 그렇잖아? 너랑 나랑 둘 다 컷에 쫓기는 거에는 뭐가 달라. 잠깐. 배경의 처지가 더 나은가?
(그렇다. 배경이 더 낫다. 그래도 적어도 이 소설 속에서 데드풀은 자주 묘사되어 존재하나, 그것이 좋은 일인가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기로 한다.)
이봐, 작가. 동전 없어?
(데드풀이 이쪽을 보며 묻고 있다. 삥뜯기기 전에 튀어야지.) 잠든 320이 옆으로 툭 쓰러지는 게 보인다. 숨도 쉬지 않는 게 호스가 빠져 묵묵하게 물만 흘리는 세탁기처럼 고요하다.
데드풀은 ‘사랑’ 운운조차 사라진 이 평화가…… 지겹다고 생각한다. 하나뿐인 독자가 죽어(?) 나자빠져 있으니, 작가에게 말을 건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